▲ 겸재의 진경산수화 대표작 금강전도 | ||
何人用意寫眞顔 누가 정성껏 참모습 그리려했나
衆香浮動扶桑外 뭇 향기 동해 밖까지 퍼지고
積氣雄蟠世界間 쌓인 기운 세상에 서려 있네
幾朶芙蓉揚素彩 몇 송이 연꽃 맑은 빛을 내뿜고
半林松栢隱玄關 소나무 잣나무 절 문을 가리네
縱令脚踏須今遍 발로 걸어 두루 본다 하여도
爭似枕邊看不慳 어찌 베개머리에서 이 그림 보는 것만 하리오
-금강전도(金剛全圖)의 제찬(題贊)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45세의 나이에 금화현감을 지내던 친구와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이 금강산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겸재는 내금강산도(內金剛山圖) 등 30폭의 그림에 담았다. 우리의 자연이 우리의 화폭 속에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겸재는 그 금강산의 감동을 잊지 못해 58세 때인 1734년 겨울 금강산 전경을 만폭동을 중심으로 한데 모은 금강전도를 완성한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금강전도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골격미를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시켰다는 데서 한국미의 한 유형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압축된 시각과 독특한 구성미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예리하면서도 힘차게 그어 내린 준법은 금강산이 가진 암벽의 웅장한 스케일을 유감없이 구현해주고 있다.”
겸재의 산수화는 우리의 강산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점에서 과거 산수화들과는 다른 한 획을 긋는다. 오랜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조선조 화단에 겸재의 등장으로 우리 산천을 우리의 독창적인 제작 방법으로 그린 산수화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3재로 불리던 관아재 조영석의 표현에 따르면 “정선에 와서야 우리 산수화가 개벽되었다”.
▲ 1000원 권 지폐에 인쇄된 계상정거도. | ||
조선조 영·정조 이전까지 우리의 산수화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회화관이나 화보에 의해서만 그 안목과 표현력이 길러졌기 때문에 박진감이나 사실감이 없어 공허한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겸재는 금강산과 서울 주변을 비롯, 한국의 자연을 두루 섭렵하며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를 창출했다. 도화서의 화원(畵員)으로 현감을 지내기도 한 겸재는 처음에는 중국 남종화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해 진경산수화로 전환했다.
진경산수화의 출현은 한국 회화사의 일대 혁명이었다. 진경산수화 명칭 자체가 동양산수화에는 없던 것으로 한국의 산수화가 중국풍의 산수화로부터 독립했음을 알리는 고유명사이기도 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란 이름은 한국의 어느 특정한 지역을 대상으로 해 객관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자연을 해석해 보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의 산천 속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는 한국인의 독특한 미적 양식이 묘사된 생동하는 그림이 겸재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진경산수의 화풍은 조선후기 화단 을 풍미하면서 강희언 김유성 최북 등으로 계승됐고 특히 단원 김홍도 등의 뛰어난 작가들에게 이어져 질적으로 세련된 회화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라는 걸출한 인재의 영향으로 다시 중국 남종화풍이 유행하며 진경산수화는 그 맥을 잇지 못하고 퇴조하지만 그 정신과 맥은 현대 한국 산수화에 연연히 남아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대표작 가운데는 현재 1000원 권 지폐의 뒷면에 인쇄된 계상정거도도 유명하다. 이 그림은 겸재가 71세 때 퇴계 이황이 쓰던 서당 주변의 산수를 담은 풍경화로 완숙의 경지를 넘어 천의무봉의 경지, 겸재가 스스로 이야기한 ‘천취(天就)’를 이룩한 그림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림 속 건물이 도산서원이냐 계상서당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가 하면 그림 자체가 위작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폐에 진경산수화가 인쇄된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