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기에 앞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일요신문] 드디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소환에서 입장 표명까지, 사상 최초의 연속이었다. 전 대법원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것도, 소환 직전 검찰이 아닌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힌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11일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양 전 대법원장은 예상된 반응만 내놓았다. 서울중앙지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조사할 양이 많기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을 더 소환해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구속영장 청구 여부도 최종 소환 후 결정할 계획인데 벌써부터 영장 청구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기소를 위한 공소장 제출까지 기간을 20여 일 정도 예상한다면, 늦어도 2월 전에는 검찰이 1년 가까이 끌어온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는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제 막 내홍이 본격화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법원이다. 법원의 내홍은 검찰 수사 마무리와 함께 본격화될 전망이다.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숨죽이고 있던 법원 내 김명수 대법원장에 반발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임기 1년 만에 사의를 밝히는 등,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
# 드디어 소환된 끝판왕 양승태 전 대법원장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A4 용지 100쪽이 넘는 질문지를 작성해 양 전 대법원장의 조사에 철저히 대비했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소환에 호락호락 응하지만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이 아닌 대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판사’들에게 호소했다.
11일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공동취재단
그는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며 책임 소재를 자신에게 돌리는 듯하더니 이내 해명을 늘어놨다. 그는 “이 자리를 빌어 국민 여러분께 우리 법관들을 믿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절대 다수의 법관들은 언제나 국민 여러분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법관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성실히 봉직하고 있음을 굽어 살펴주시기 바란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법관들도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법률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고, 이를 믿는다”며 무혐의를 호소했다.
이례적인 기자회견이었다. 통상 피의자는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소위 말하는 포토라인에서 언론의 질문을 받았는데,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에서 기자회견을 희망했다. 법원행정처가 반대하면서, 대법원 내부가 아닌 정문 앞 기자회견으로 대체됐지만 판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근무한 경력이 있는 판사는 “잘잘못은 검찰 수사와 법원에서 다시 판단되겠지만, 나름 존경했던 선배이자 전직 대법원장이 소환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며 “특히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다 보니 그런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1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공동취재단
# 검찰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사실관계를 아는 대로 검찰 조사에서 설명하겠다”고 밝힌 양 전 대법원장. 서울중앙지검 15층 조사실에서 이뤄진 조사에서 “재판거래나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 일절 관여한 바 없다”며 혐의를 강력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달 박영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영장청구가 기각된 뒤 한 달 동안 이어진 보강수사를 통해 입증한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를 집중 추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일제 강제징용사건의 판결을 뒤집기 위해 단순히 지시와 보고만 한 게 아니라 재판개입에 적극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불법적인 재판개입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묵비권 행사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구속영장청구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는 평이다.
# 고위법관 중심으로 ‘불만’…김명수호 흔들
한두 차례의 추가 소환과 기소만 남은 검찰의 사법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하지만 법원의 내홍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분위기다. 그동안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참고 있던 반발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 소환과 함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 주효했다.
“그 전부터 곪아오던 문제들이 터진 겁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이제 심판대에 오를 겁니다.” (법원 고위 관계자)
안철상 전 처장이 밝힌 사의 배경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것. 하지만 법원 내에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자꾸 말을 바꿔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앞선 고위 관계자는 “당초 김명수 원장이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며 대법관들을 비롯, 안철상 처장을 설득했다가 갑자기 ‘검찰 수사에 응하겠다’고 얘기해서 다들 할 말을 잃은 적이 있다”며 “김 대법원장이 판사 출신 대법관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잃은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안철상 전 법원행정처장. 최준필 기자
검찰의 저인망식 사법농단 수사에 불만을 드러내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최근 재판 업무로 복귀하겠다고 사의를 표명하며 보직 변경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는 풀이다. 실제 안 처장은 사법 불신이 커지며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한 ‘화염병 테러’까지 발생하자 검찰 수사를 겨냥한 작심 발언을 했다.
그는 “아무리 병소를 많이 찾는다고 하더라도 해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사법농단 의혹 수사 관련, 검찰의 영장 청구 행태를 비판했던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은 이미 사의를 표하는 등 다른 일부 고위 법관들도 ‘무너진 신뢰에 대한 자책감’ 등으로 진퇴를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후임으로 조재연 대법관을 신임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했고, 조 신임처장 역시 ‘화합’에 무게를 둔 취임사를 내놓았다. 조 신임처장은 “최근 일련의 일들로 사법부의 위상은 끝 모를 정도로 떨어졌고 법원 가족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깊다”며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의견을 모으고 화합해야 한다. 스스로가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국민들로부터 더욱 더 외면 받고 영원히 신뢰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희망적으로 보는 판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익명을 요구한 경력 10년 미만의 평판사는 “최근 법원 내에서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아니면 최근 법원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는다”며 “법원행정처가 잘못한 것도 있겠지만 검찰이 너무 다 뒤져서 죄로 만들려고 했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우려 섞인 반응도 있다”고 언급했다.
2018년 시무식 당시의 김명수 대법원장. 임준선 기자
고위직으로 갈수록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거세진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 조직을 검찰 수사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 부분이 설명이 잘 안 됐다”며 “현재 법원 내에서는 관여된 판사들의 징계가 약하다, 심하다부터 수사 범위까지 판사들마다 입장이 다 다르고 소통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만에 하나 법원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관련자들이 무죄라도 받는다면, 정말 검찰 수사를 방치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은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라며 “정권이 3년차에 접어들면서 레임덕 징후가 나오고, 무엇보다 검찰 수사가 끝나 재판만 남았기 때문에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을 흔드는 목소리를 개진하는 판사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