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SBS는 쇼트 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코치였던 조재범 씨를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지난해 12월 17일 고소했다고 보도했다. 심석희가 밝힌 성폭행의 시작은 2014년이었다. 2014년은 심석희가 만 17세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보도에 따르면 심석희는 2014년부터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전까지 4년 가까이 지속적인 성폭력 등의 피해를 봤다. 국제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거나 대회가 끝난 뒤에도 범행은 계속됐으며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는 등의 말을 들었다고 심석희는 주장했다. 경찰은 조 전 코치의 휴대전화와 태블릿 PC 등을 입수해 분석하고 있다.
심석희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세종은 8일 보도자료를 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에게 지도자가 상하관계의 위력을 이용한 폭행과 협박을 가했다. 심석희 선수의 변론을 맡으면서 회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됐다”며 “성폭행 등의 범죄행위가 이뤄진 곳은 한국체육대학교 빙상장 지도자 라커룸,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성 선수들이 지도자들의 폭행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 있음에도 전혀 저항할 수 없도록 얼마나 억압받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심석희의 폭로로 빙상계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피해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일요신문’은 최근 빙상계 성폭력 의혹 사건 4건을 제보 받았다. 물리적 폭행과 언어 폭력도 포함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성추행과 폭행과 언어 폭력이 10대 청소년을 정신과 치료부터 극단적 선택 시도까지 내몰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요신문’은 전현직 빙상 선수 및 지도자, 학부모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취재를 거쳐 단순 주장을 제외하고 정황이 뚜렷한 내용만 간추려 공개한다.
빙상계의 한 인사에 따르면 한체대에서 선수반으로 강습을 듣던 한 고등학생은 2017년 하반기 내내 한체대에서 근무하는 사설강사 A 씨에게 성추행과 지속적인 언어 폭력, 물리적 폭행을 당했다. 이로 인해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고등학생은 A 씨의 계속된 가족 관련 폭언 등으로 큰 충격을 받아 한체대를 떠났다. 이 학생 외 또 다른 학생 역시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별건의 제보에 포함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건 또 A 씨였다. 이 사건을 잘 아는 또 다른 빙상인은 “피해 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신과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했다. A 씨는 ‘일요신문’의 거듭된 전화에도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두 미성년자의 피해가 문제되지 않은 건 부모의 의중이 컸다. 빙상계 인사에 따르면 몇몇 주변인은 피해 학생 부모에게 “이건 너무 큰 사안”이라며 “아이가 더 고통 받기 전에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부모는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고 반응했다.
일부 학부모의 이러한 행동으로 빙상계의 성폭력 문제는 ‘거래의 조건’이 되기 시작했다. 과거 대한빙상경기연맹 소속이었던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2013년쯤 태릉 국가대표선수촌에서도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대표 지도자와 선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피해 선수는 “성폭행 당했다”며 주변 사람에게 이 내용을 알렸다. 이 사실은 빙상계 전반에 조금씩 퍼져나갔다.
이 관계자는 “피해 선수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 왔던 개인코치가 빙상계 고위직 쪽에 이 사실을 알렸다. 빙상계는 이 사건을 은폐하기 시작했다. 피해 선수 학부모에게 제시된 건 국제대회 메달이었다. 모종의 거래 끝에 피해 선수는 결국 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회에서 피해 선수는 단 한 경기만 뛰고 메달을 받았다. 피해 선수가 뛴 단 한 경기에서는 기존 주전 선수가 빠졌는데 선발 제외 이유는 배탈이었다. 당시 주전에서 제외됐던 선수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당시 난 전혀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학부모는 피해 선수의 개인 코치에게 독일제 고급 자동차를 선물로 줬다”고 말했다. 피해 선수의 개인 코치는 빙상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옛 대한빙상경기연맹 고위직의 아들과 같은 존재로 알려졌다. 이 코치가 사건과 메달이 교환되도록 연락책 역할을 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주장이었다.
이 관계자가 가해자로 지목한 당시 국가대표 지도자는 사실 국가대표 지도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 범법행위로 중징계를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옛 쇼트 트랙 국가대표 지도자는 “별로 통화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지난 일인데요. 뭐. 걔한테 제가 뭐 한 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건이 거래의 조건이 되는 빙상계의 이러한 관습은 일부 지도자의 폭주를 키웠다. 2012년 여름 한체대 코치 B 씨는 자신이 지도하던 여자 선수를 자신의 오피스텔로 유인해 성추행을 시도했다. 화장실로 도망간 피해 선수가 부모에게 알려 큰 화는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역시 모종의 거래가 있었고 사건은 묻혔다. 이후 B 씨는 쇼트 트랙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됐다.
2014년 1월 B 씨는 돌연 잠적했다. 2012년 벌어진 성추행 의혹이 그제서야 제기된 까닭이었다. B 씨의 스승 전명규 한체대 교수는 당시 이 사실을 알고 사건 은폐를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피해 선수에게 “실업팀에 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하며 회유해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정황이 나왔다. 전 교수는 피해 선수에게 “네가 참아야 된다” “이러다 못 볼 꼴 본다” “법정에서 여자가 먼저 유혹했다고 하면 너만 다친다”는 말까지 했다고 알려졌다. B 씨는 아무런 징계도 수사도 받지 않았다.
또 다른 빙상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2016년쯤 사귀자고 여러 차례 압박해서 큰 고통을 겪게 했다. 2018년 7월에는 자신의 제자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 주차장으로 불러낸 뒤 자신의 차에 태우고선 계속 사귀자고 압박을 하며 목까지 졸라 멍 자국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2018년 4월 목동빙상장에서 한체대를 지휘하는 B 씨
B 씨가 이제껏 받아 든 징계는 딱 한 번이었다. 2016년 B 씨는 개인 비위가 드러나 영구제명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감경됐고 그 후로 한체대에서 사설 강사로 일하며 목돈을 벌었다. 전명규 교수는 B 씨에게 한체대 선수단을 아예 맡겼다. 그 무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한체대 선수단을 모두 통솔한 건 B 씨였다. 그는 현재 목동빙상장에서 사설 강사로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속적으로 연락했지만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관련 기사: ‘조재범 전임자+성추행 의혹‘ 빙상코치, 목동빙상장 개인강습 둘러싼 뒷말 무성한 내막)
스승은 은폐했고 일부 사건은 거래됐다. 모두가 곧 잊었다. 그리고 계속됐다.
최훈민·이동섭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