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널뛰기는 규방에 갇혀 살던 아낙들이 명절마다 즐겨 하던 놀이였다. 사진은 서울 운현궁에서 널을 뛰어 보며 즐거워하는 시민들. 뉴시스 | ||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앞집의 숫개야 네 왔는냐
뒷집의 순이야 너도 왔니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中略)
규중생장 우리 몸은 설놀음이 널뛰기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맞이 널뛰자
널뛰기를 마친 후에 떡국노리를 가자세라
-안동 지방의 널뛰기 노래-
널뛰기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설날이나 단오 추석 등 큰 명절날 가장 즐겨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였다. 여성들의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규방에 갇혀 살던 아낙들이 널뛰기할 때만은 하늘 높이 뛰어 올라 바깥세상을 구경하곤 했다. 설빔으로 곱게 단장한 처녀들이 널을 뛸 때마다 휘날리는 치마 자락과 옷고름의 모습에 이를 보던 동네 총각들의 가슴도 함께 뛰었을지 모른다.
긴 널빤지의 한 가운데에 짚단이나 가마니로 밑을 괴고 그 양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마주 보고 번갈아 뛰면서 즐기는 널뛰기는 특별한 기구도, 특별한 연습도 필요 없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널빤지 가운데를 짚단 등으로 괴는 대신 널 양쪽 끝부분의 땅을 파기도 했다. 또한 널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널 가운데에 사람이 앉기도 한다. 널을 뛰는 사람의 몸무게가 차이가 날 때는 몸무게가 적은 사람에게 널을 많이 주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데 이를 ‘밥을 준다’라고 표현했다. 편을 갈라 누가 높이 뛰는지, 혹은 누가 먼저 지쳐 널에서 떨어지는지를 겨루기도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항간에서 부녀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 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이나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것을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널뛰는 아가씨들/ 울긋불긋 차렸구나/ 뛰고 굴러 서로 높이 오르려고/ 담 너머 얼굴 뵈는 것 부끄러운 줄 모르네’라는 시도 남겨 당시 여성들이 널뛰기할 때만큼은 인습에서 자유로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널뛰기 노래도 전국적으로 여럿 전해 내려온다. 함경도 함흥 지방에서 내려오는 노래는 ‘허누자 척실루/ 네 머리 흔들/ 내 다리 삽작// 허누자 척실루/ 네 댕기 팔랑/ 내 치마 낭럭// 허누자 척실루/ 네 눈이 휘휘/ 내 발이 알알’이라고 널뛰기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허누자 척실루’란 철썩하고 널을 굴러 뛰는 의성어라고 한다. 널을 굴러 뛸 때 댕기가 팔랑이고 치마가 휘날리는 모습하며 높이 올라 눈이 아찔하고 떨어져 발이 얼얼한 게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그런가하면 전남 화순 지방 널뛰기 노래는 ‘형네 집서 콩 하나를 얻어다가 심었더니/ 콩 한 되가 되었네/ 한 되를 심었더니/ 한 말이 되었네/ 한 말을 심었더니/ 한 섬이 되었네’라는 내용으로 널뛰기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풍년을 기원하는 기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속담에 ‘널뛰기를 하면 그해에는 발바닥에 가시가 들지 않는다’라든가, ‘처녀 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라는 말도 있는데 당시 널뛰기가 여성들의 신체 단련 운동이기도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은 없고 다만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는 여성들도 말타기나 격구 같은 활달한 운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널뛰기 역시 놀이의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여성들이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민간에서는 그 유래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옛날 유교사회에서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여인네들이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담장 곁에 널을 놓고 뛰면서 밖을 내다보려고 만든 놀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속설로는 남편이 감옥에 갇히게 되어 안부가 몹시도 궁금한 그의 아내가 널을 뛰면서 담장 너머 옥 속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엿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