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멘’ 스틸 컷
1973년, 밥 멍거라는 사람에게 아이디어 하나가 갑자기 떠오른다. 성경에 등장하는 ‘666’이라는 짐승의 수가 새겨진 ‘안티크라이스트’, 즉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만약 꼬마아이라면 훨씬 더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고, 친구인 영화제작자 하비 버나드에게 이 얘기를 한다. 뭔가 촉이 온 버나드는 이 콘셉트를 하나의 시나리오로 발전시킬 작가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싶어 하지 않았고, 결국 데이비드 셀처라는 TV 작가가 펜을 잡았다.
제작자 하비 버나드
먼저 로버트 쏜 역할을 맡을 배우를 물색했지만, 아무도 이런 불길한 영화에 출연하려 하지 않았다. 윌리엄 홀든은 악마가 나오는 영화는 나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그는 ‘오멘’이 흥행하자 1978년에 ‘오멘 2’에 출연한다). 찰턴 헤스턴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그는 1980년에 ‘오멘’과 매우 유사한 소재인 ‘공포의 피라미드’ 주인공을 맡는다). ‘죠스’(1975)의 경찰서장이었던 로이 샤이더, ‘메리 포핀스’(1964)로 유명한 딕 밴 다이크 등도 모두 거절했다. ‘올리버’(1968)의 빌 사이크스였던 올리버 리드도 고사했다. 이때 프로듀서인 버나드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당대의 대배우인 그레고리 펙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리고 의외의 승락 답신을 받는다.
어쩌면 이때부터 저주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청소년 시절 한때 신부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던 그레고리 펙. 그는 ‘오멘’이 종교적 소재의 호러보다는 심리적 스릴러에 가깝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 그런데 촬영 3개월 전인 1975년 6월 27일, 그레고리 펙의 아들 조너선 펙이 30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을 한다. 방송사 리포터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고, 아버지 그레고리 펙은 바쁘다는 이유로 평소에 아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레고리 펙
악마의 경고 같은 일들은 이어진다. 그 무대는 하늘이었다. 그레고리 펙이 미국에서 촬영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갈 때, 그가 탄 비행기는 엔진에 벼락을 맞았다. 그리고 8시간 뒤 작가인 데이비드 셀처가 탄 비행기 역시 벼락을 맞는다. 프로듀서인 하비 버나드는 영화 준비 때문에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 갔을 때, 그가 서 있는 바로 옆에 벼락이 쳤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감독은 ‘오멘’의 성공 이후 ‘슈퍼맨’(1978) ‘구니스’(1985) ‘리쎌 웨폰’(1987) 등으로 당대의 흥행사가 되는 리처드 도너. 그는 ‘오멘’의 도입부에 런던의 전경을 보여주고 싶었고, 항공 촬영을 위해 경비행기 한 대를 예약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촬영 직전 예약을 취소해야 했는데, 이때 중국에서 온 사업가 다섯 명이 그 비행기를 대신 빌린다. 그러나 활주로를 벗어난 비행기는 얼마 후 새떼가 엔진에 들어가면서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다.
리처드 도너 감독
그러나 이 모든 건 서막에 불과했다. 아직 촬영은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오멘’의 제작진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스태프 중 몇 명은 이 영화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황청이 그토록 제작을 반대했던 영화 ‘오멘’. 악마주의자들은 이 영화의 제작을 사탄이 원치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1975년 10월에 촬영은 시작되었고, 한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잠깐의 평화였다. 촬영 전에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괴이하고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신문은 연일 그것을 보도했다. 마케팅이라면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다음 편에선 ‘오멘’ 촬영 현장과 개봉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해보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