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입단의 꿈을 이룬 김제나 초단이 일요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지옥 같았던 1년, 방황도 많았다. 예전에 가졌던 바둑에 대한 자만심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놀러 간다는 마음으로 참가한 춘향배에선 덜컥 우승해 ‘제3대 바둑 춘향’에 이름을 올린다. 프로 초단이 된 김제나는 “이번 입단대회도 큰 기대가 없었어요. 기대를 할수록 상처가 크거든요. 사실 여기까지만 하고 바둑을 접으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지금도 기쁨보단 떨어진 친구들에 대한 안쓰러운 감정이 더 큽니다”라고 말한다.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더 성숙한 것 같아요. 마음이 산만해지고 기분이 우울할 때는 혼자 코인 노래방을 갔어요. 가수 알리가 부른 ‘지우개’란 곡을 좋아하는데 작년이 제 인생에도 지우고 싶은 시절이 되었네요. 도장에서 밤 9시까지 규율하는 생활이 싫어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범님들께 많이 죄송해요. 다들 저를 말 안 듣고, 배려심이 없고, 공부 안 하는 날라리라고 알고 있을 걸요. 제겐 ‘흑역사’인데 지나고 나니 다 꿈만 같네요. 요즘 주위 어른들이 저보고 철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아직도 오해하시는 분이 있는데 저도 알고 보면 정 많고 속도 깊은 여자랍니다. 특히 ‘예의와 의리’를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김제나는 2001년 태어나 9세부터 경기도 부천에서 바둑을 배웠다. 6세 동생을 따라 바둑교실에 갔다가 19로에 푹 빠졌다. 동생은 금방 관뒀지만, 김제나는 달랐고 기재를 인정받았다. 프로의 길로 방향을 잡고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와 본격적인 바둑수업을 위해 장수영 도장, 이세돌 도장, 충암 도장 등을 거쳤고,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공부했다. 그녀의 집과 가까운 노량진역 한 카페에서 만나 입단이야기와 미래의 꿈을 전해 들었다.
김제나 초단은 지난해 입단에 실패하면서 방황하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김지은이었어요. 너무 평범해서 3년 전에 개명했는데 엄마가 작명소에 ‘바둑을 두며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했어요. 한자로는 절제할 ‘제’, 붙잡을 ‘나’입니다. 가끔 영문 이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이름 때문에 별명이 ‘언제나’ 또는 ‘커제나’였어요. 제가 커제 9단을 워낙 좋아해서 별명에 불만은 없었습니다.”
―입단 문턱에서 좌절하면서 방황한 시간이 있었다고 들었다.
“2017년 12월 입단대회 본선 16강에서 어린 친구에게 지고 충격 받아 3개월간 칩거했어요. 이후 2018년 3월에 입단대회에 다시 나갔는데 최종라운드까지 갔다가 또 떨어지고, 이후로 1년은 정말 마음이 힘들었어요. 바둑에 대한 자만심이 모두 날아갔죠. 집에 있기 싫어 가출해 신촌에 있는 고깃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하며 고시원에서 한 달을 혼자 살기도 했어요. 시급이 1만 원이 채 안 되었는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지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도 생겼고요.”
―그래도 작년 7월 열린 제3회 국제바둑 춘향선발대회에서 우승했다. 우승 상금만 1000만 원인 큰 아마대회였다.
“당시도 방황이 끝나지 않았을 때죠. 도장에 들렀는데 사범님들이 출전해보라고 권유해 놀러간다는 마음으로 남원에 내려갔어요. 정말 얼떨결에 결승까지 가서 류승희 언니도 이기고 우승했네요. 바둑에 대한 마음이 식었을 때라 별로 기쁘진 않았어요. 상금은 엄마에게 모두 드렸어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하는 선배 프로기사는?
“최정 사범님을 특히 좋아해요. 얼굴만 봐도 마냥 좋아요. 말씀도 아주 재미있게 하셔서 닮고 싶어요. 더 위에 선배기사는 김효정 사범님이요. 유쾌해 보이고, 당당한 밝은 모습이 멋져 보여요. 남자기사는 김지석 9단과 커제 9단입니다. 김지석 사범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이죠. 제 취향이 독특하단 말도 듣는데 전 커제도 아주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만나서 ‘프로기사 김제나’의 사인을 전해주고 싶네요(웃음).”
제3회 국제바둑춘향선발대회에서 우승해 바둑춘향 진에 오른 김제나(오른쪽). 왼쪽은 결승에서 대결한 아마랭킹 2위 류승희 선수.
―자신의 기풍은 어떤가?
“다들 저보고 전투형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실리파’입니다. 극단적으로 실리를 좋아해요. 바둑공부는 다들 하는 기보 놓기, 사활 풀기보다 실전 대국을 좋아합니다. 인터넷 대국도 즐겨합니다. 대화명도 ‘김제나’ 본명을 써요.”
―드디어 프로기사가 되었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 당장 최정, 위즈잉 같은 최고수를 이기긴 어렵겠죠. 우선은 연구생 때 경쟁하다가 먼저 입단한 김경은, 강지수, 허서현, 이도현 등이 제 목표입니다. 승부사로 활동하는 동안 제 또래들은 확실히 잡겠어요. 강지수 초단은 좋아하는 언니지만, 어쩔 수 없네요(웃음). 더 나이가 들면 아버지가 계신 중국으로 가서 보급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우선 실력을 인정받아 ‘꿈의 리그’ 여자바둑리그에서 선수로 뛰고 싶어요. 궁륭산병성배 같은 세계대회에서도 꼭 우승하고 싶습니다.”
김제나 초단은 “마지막으로 이번 입단대회에서 함께했지만 실패한 친구들에게 꼭 위로를 전하고 싶어요. 저도 똑같이 아팠기에 별거 아닌 한 마디도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아요”라면서 말했다. “우린 모두 승부사니까 미안하단 말은 안 할게. 언니, 동생들아 끝까지 버텨야 해, 굳은 의지 가지고, 마음먹은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믿어. 힘내고, 절대 무너지지 마. 모두 사랑해.”
박주성 객원기자
여자입단대회는 연구생 잔치! 차주혜·김제나·김노경 입단 제51회 여자입단대회. 왼쪽부터 김노경, 차주혜, 김제나 초단. 여자 새내기 프로는 모두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 되었다. 차주혜(19)·김제나(17)·김노경(16)이 10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51회 여자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최종 4강 토너먼트에서 김제나와 김노경이 각각 차주혜와 조은진을 꺾고 먼저 입단을 확정했고, 이어 열린 최종국에서 차주혜가 조은진에게 승리를 거둬 최종 입단했다. 차주혜 초단은 연구생 생활 8년 만에 꿈을 이뤘다. 지난해 하림배 여자국수전에 프로기사를 상대로 2연승해 본선 16강까지 오른 경력이 있다. 김제나 초단은 지난 49회 입단대회 결정국에 패해 탈락한 아픔을 딛고 1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가장 어린 김노경 초단은 작년 지도사범인 전용수 초단과 짝을 이뤄 출전한 제8회 SG배 페어바둑최강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1월 3일부터 시작한 제51회 여자입단대회는 예선에 41명이 출전했다. 예선 통과자 12명과 전기 시드 4명이 참가한 본선은 7일부터 더블일리미네이션(1·2회전)과 최종 토너먼트(4강)로 진행했다. 새내기 초단 3명이 입단하면서 (재)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는 모두 358명(남자 290명, 여자 68명)으로 늘었다. 박주성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