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그네가 창공을 가르고 있다. 작년 6월 8일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 열린 ‘법성포 단오제’의 한 장면이다. 뉴시스 | ||
“장장채승(長長彩繩) 그넷줄 휘느러진 벽도(碧桃)까지 휘휘 칭칭 감어매고 섬섬옥수(纖纖玉手) 번 듯 들어 양 그네줄을 갈라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 듯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 속의 이리가고 저리 갈 제 그 때의 도련님 살펴보시더니 마음이 으쓱 머리끝이 쭈빗 어안이 벙벙 흉중이 답답 들숨날숨 꼼짝딸싹을 못허고 눈을 번히 뜨고 방자를 부르는디….”
그네 타기는 동네의 큰 자연목을 이용하거나 양편에 큰 기둥을 두 개 세워 두 가닥의 줄을 매고 줄의 맨 아래 끝에 밑싣개라는 발판을 만들어 놓고 사람이 그 위에 올라서거나 앉아서 몸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놀이다.
그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발견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네뛰기는 그 모양과 기예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도 멋과 흥이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전통 민속놀이로 계승되고 있다.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옛날 부녀자들도 단오 때만은 너나없이 그네터로 뛰어나왔을 것이다. 부녀자들이 고운 저고리 치마를 입고 그네를 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이다. 더구나 단오날 부녀자들이 창포 뿌리를 캐다가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나와 그 은은한 향내가 퍼져 나가면 씨름판에서 힘을 겨루던 총각들도 넋을 잃고 쳐다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네는 대개 4월 초파일을 전후로 매어놓고 5월 단오절에 이르는 약 한 달 동안 계속됐으며 특히 단옷날에는 그네뛰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남부 해안지대에서는 팔월 한가위 무렵에도 그네를 뛰었다고 한다.
▲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 ||
그네뛰기 풍습은 고대 그리스 등에도 있었는데, 여자들은 봄이 되면 성적인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로 그네를 탔다고 한다. 중국문헌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의 놀이가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에 들어와 한나라 때에는 궁중 후정에서 즐겼고, 당나라에서도 민간에서 여자의 놀이로 발전하여 반선희(半仙戱)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왔던 놀이로 추측되며 고려시대에는 궁중이나 상류사회에서 성행한 사실이 기록에 남아있다. <송사(宋史)>에는 고려 현종 때 조파사(朝派使) 곽원(郭元)의 글에 단오날 그네뛰기를 즐겼다고 기록돼 있으며 <고려사> 최충헌전은 단오 그네뛰기에 4품(品) 이상 문무백관이 참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최이전(崔怡傳)에는 천수백 명이 모여 기악백희(伎樂百戱)를 즐겼는데 그네도 뛴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이미 상하를 막론하고 그네뛰기가 활발하였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여자들이 웃고 떠들고 놀며 그네를 타는 일이 체면과 체통을 지켜야 하는 양반들의 비위에 거슬려 양반집에서는 멀리하게 됐다.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성행하여 단오절만이 아니고 평상시에도 그네를 즐겼다.
그네 대회는 대개 높이 올라가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며, 그네 앞에 높이를 재는 장대를 세우고 장대 위에 방울을 매달아놓고 뛰는 사람의 발이 방울을 차서 울리도록 하고, 방울소리의 도수로서 승부나 등수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네는 혼자 뛰는 외그네, 두 사람이 마주 올라서서 뛰는 쌍그네, 몸을 비틀어 줄을 꼬이게 한 다음 누가 가장 오랫동안 풀리는지 겨루는 꽈배기 등의 놀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