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29일 보육교사 이 아무개 씨의 사망 시간을 추정하기 위해 시신이 발견된 농지 배수로에서 돼지 사체 부패 실험을 했다. 사진제공=제주지방경찰청
지난 2009년 2월 8일. 새벽 귀갓길 실종된 보육교사 이 아무개 씨(당시 27·여)가 제주시 애월읍 고내오름 근처 농업용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시 사건은 피해자 시체나 소지품에서 제3자 지문이나 유전자정보(DNA) 등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 불리며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가 2016년 2월 장기미제 전담팀이 꾸려지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지난해 5월 제주경찰은 9년 10개월간 장기 미제로 남아 있던 ‘제주 보육 여교사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박 아무개 씨(50)를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정황 증거만으로는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청구가 기각됐다.
경찰은 7개월간 보강 수사 끝에 지난해 12월 18일 피의자 박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했으며, 21일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피의자가 드디어 10년 만에 법정에 서게 된 것.
제주지방검찰청은 16일 보육교사 피살사건 피의자 박 아무개 씨에 대해 강간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택시기사였던 피의자 박 씨는 2009년 2월 1일 택시에 탑승한 보육교사 이 아무개 씨를 살해하고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고내봉 옆 배수로에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9년 2월 1일 새벽 보육교사 이 씨의 휴대전화 신호가 끊겼다. 사건 당일 이 씨는 어린이집에 출근하지 않았고, 가족들은 실종 신고를 했다. 일주일 후 그녀는 애월읍 고내리 농업용 배수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박 씨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하고, 2009년 실시한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거짓 반응’이 나왔지만 거기까지였다. 현행법상 거짓말 탐지기는 증거능력이 없다.
택시기사인 박 씨가 사건 당일 시신 발견 지역을 지나갔다는 동선은 확보했으나 더 이상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박 씨는 혐의를 벗었고 제주도를 떠났다.
이 사건은 수사를 맡았던 제주서부경찰서가 사건 발생 3년 4개월 만인 2012년 6월 수사본부를 해체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가 2016년 2월 장기미제 전담팀이 구성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경찰은 박 씨의 차량 운전석과 좌석, 트렁크 등과 옷에서 이 씨가 사망 당시 착용한 옷과 유사한 실오라기를 다량 발견해 미세증거 증폭 기술을 이용해 증거로 제시했다.
제주지방검찰청.
양수진 미제사건 수사팀장(제주청 강력계장)은 “9년 사이 미세증거를 증폭시켜 보는 기술이 발달해 가능했다”며 “피해자의 옷으로 덮인 어깨에서 박 씨 셔츠와 동일한 섬유조각이 발견된 것은 확실한 접촉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추적을 통해 지난해 5월 16일 경북 영주에서 박 씨를 체포, 섬유조직 증거를 바탕으로 박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은 경찰이 제시한 섬유 조각이 유사성에 그쳐,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던 박 씨는 체포 64시간 만인 지난해 5월 19일 풀려났다.
당시 법원은 “범행 현장 부근 CCTV에 촬영된 차량이 피의자가 운행한 택시라고 단정할 수 없고, 피해자 사체에서 피의자 의류 섬유와 유사한 면 섬유가 발견됐다는 감정 결과는 유사하다는 것일 뿐,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경찰은 택시 동선을 재분석했다. 지난해 5월 구속영장 기각 이후 CCTV에 나오는 차량이 박 씨의 택시임을 명확히 하고 다른 차량의 동선을 보다 면밀히 파악해 피해자가 다른 차량에 탑승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보완했다.
미세섬유 증거도 보강했다. 경찰은 피해자 이 아무개 씨의 오른쪽 어깨 부위 피부조직에서 피의자 박 씨가 사건 당시인 2009년 2월 입었던 옷과 유사한 실오라기를 발견했다.
경찰은 2∼3㎝ 크기의 작은 옷 실오리를 미세증거 증폭 기술을 이용해 피의자 박 씨가 사건 당시 착용한 셔츠와 유사한 종류임을 입증했다. 담당검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30분짜리 발표자료(PPT)까지 만들어 판사를 설득했다.
향후 검찰은 피의자의 자백이나 목격자의 진술, DNA 등 직접증거 없는 정황 증거만으로도 범행을 입증해야 한다.
검찰은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한을 풀기 위해 수사검사가 공판에 직접 관여해 공소 유지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예정”이라며 “피해자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등 피해자 지원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해송 기자 ilyo9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