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사관의 ‘전략적 편의’가 발생한다. 특정한 단어나 범죄 관련 상황을 풀어 설명한 것을 문서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불리한, 수사기관에 유리한 표현이나 문장이 들어가곤 한다. 이에 조사가 끝난 뒤, 수사기관은 진술한 피의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동의의 의미로 지장이나 도장을 조서 페이지마다 찍는다). 소환자가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조서 열람’이다. 항의를 통해 문장이나 표현을 수정할 수 있다.
보통 길어도 6~7시간 정도면 충분한 조서 열람.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36시간)은 검찰의 수사 관련 질문과 답변에 준하는, 엄청난 시간을 할애했다. 이는 조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향후 재판은 물론 당장 가능성이 거론되는 구속영장 실질심사 때, 매우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특히 ‘직권남용’이라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될 애매한 혐의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이 적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1월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검에서 첫 조사를 마친 뒤 4시간가량 조서 열람을 하고 귀가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다시 나와 조서열람한 양 전 대법원장의 전략
지난 1월 11일 처음 소환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지난 11일 첫 조사를 마친 뒤에도 4시간가량 조서 열람을 하고 자정 전에 귀가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검찰에 나와 10시간가량 조서를 확인하는 등 조서 확인에 36시간이나 쏟아 부었다.
조사 양이 방대했던 전직 대통령들보다도 3배 이상 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7시간 30분, 이명박 전 대통령은 6시간가량 조서를 열람한 뒤 새벽에 귀가했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처럼 소환 조사 다음날 검찰에 다시 나와 조서를 열람하는 일은 거의 드문 경우다.
구속영장 청구 시 기각을 위한 법리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이 나온다. ‘죄’를 부인하거나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구속영장 발부의 사유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검찰은 법원에서 주장한다. 죄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에 죄는 부인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야 하고 이를 조서에 담아야 한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를 위해 조서 열람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검찰에 적은 표현들에 반발하고,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권남용이 뭐길래…적용 자유로운 게 함정
사법연수원 2기로 40년 넘게 법으로 판단해온 양 전 대법원장. 법전문가 양 전 대법원장은 향후 법정에서 이뤄질 법리 부분도 문제 삼았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형법상 직권남용 혐의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했을 때’ 적용이 가능하다.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법 전문가 양 전 대법원장은 구성요건을 문제 삼았다. “본인이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죄도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직권의 남용과 의무 없는 일, 권리행사 방해’ 등 구체적인 구성요건을 조목조목 문제 삼았다.
직권남용 혐의의 특성이기도 하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 및 최순실 씨 국정농단 사건 때부터 법조계를 지배해 온 혐의다. 검찰 내에서조차 그 구성요건의 애매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우리가 최근 공무원들의 정치적인 사건을 수사할 때 ‘직권남용’을 많이 적용하는데 전임자 기준으로 ‘해왔던 일’인지를 살피는 게 주요 기준 중 하나”라며 “혹시 그렇게 해왔다고 하더라도 따로 명시돼 있지 않으면 적용하곤 한다. ‘직권’이라는 단어가 너무 추상적이고 업무 분장표가 애매한 우리나라의 특성 상 자리에 따른 업무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정의하는 것조차도 사실 애매한 게 맞다”고 인정했다.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법원은 최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 비교적 좁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직권남용 혐의가 ‘남용’되고 있다는 판단인 셈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사찰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공직자를 뒷조사한 혐의로 기소된 최윤수 전 국정원 2차장에게도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부당한 지시를 명시적인 것은 물론 묵시적으로도 승인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대법원 앞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기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법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할까
대법원장의 역할만 놓고 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그 부분에서 내놓을 해명이 더 많다. 법원조직법상 대법원장은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고 관계 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 특히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장을 지휘해 법원행정처의 사무를 관장한다. 직권을 남용했다고 하기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양 전 대법원장이 실제 형사 처벌을 받으려면, 법원의 사법권 남용 의혹들이 ‘권한 밖 업무’임을 입증해야 한다. 재판 거래 역시 ‘미수에 그쳤다’면 처벌이 불가하다. 직권남용은 ‘실패’했을 경우 처벌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강요죄 적용은 더 애매하다. 강요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을 때 적용되는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가능하다. 하지만 강요죄의 핵심인 ‘폭행’ 또는 ‘협박’의 존재를 입증해야 해서 법정에서 무죄가 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게 법조계 내 평이다.
양 전 대법원장을 모셔본 법조계 관계자는 “직접 지시를 하더라도 비인격적으로 하거나 절대 논란이 있을 수 있게끔 하지 않는 게 양 전 대법원장”이라며 “직권남용은 검찰이 임의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평판사들이 보고 과정에서 절대 접촉할 수 없는 대법원장을 강요로 걸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