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조 원이 넘는 국민연금을 운용하는데 의사 결정을 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지난 16일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를 두고 올해 첫 회의를 열었다. 구체적인 주주권 행사 방안이나 최종 결정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서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전문위)가 주주권 행사 여부와 범위를 검토해 보고하는 방안만 의결했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기존 국민연금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확대·개편한 조직이다. 전문위는 1월 중으로 관련 논의를 마칠 계획이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려면 상법상 주주총회일 6주 전까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한진칼과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오는 3월이라 2월 중순에는 최종 결론이 나와야 한다.
기금운용위는 오는 1월 31일 다시 회의를 열어 전문위의 보고를 받고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주주총회에서 임원 선임·해임, 직무정지, 정관 변경, 회사 합병·분할, 주식 이전·교환 등을 제안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해 적극적은 주주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진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 국민연금 “개선 기회는 충분히 줬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향은 적극적인 경영참여 쪽으로 기울었다. 국민연금은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자체 개선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줬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4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등 총수일가가 벌인 ‘갑질’ 사건으로 대한항공 주가가 흔들리자,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에 해결 방안을 만들어 달라는 비공개 서한을 발송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뚜렷한 개선책을 내놓지 않았고 국민연금-경영진 면담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국민연금 판단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금운용위 회의에 앞서 열린 실무평가위원회에서부터 주주권 행사 여부, 구체적 행사 방안을 전문위에 회부하도록 하는 안건이 압도적 찬성을 얻었다. 한 국민연금 관계자는 “실무평가위원 가운데 다수가 전문위원회에도 들어가 있는 만큼 주주권 행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기금운용위 회의에서도 앞서의 안건이 찬성 8표, 반대3표로 마무리 됐다.
향후 국민연금의 구체적인 주주권 행사 방안도 거론된다. 임기가 마무리되는 임원들의 재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대표적이다. 현재 한진칼은 조양호 회장과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석태수 대표이사 등 3명의 상근임원과 이석우, 조현덕, 김종준 등 3명의 사외이사, 윤종호 상근감사 등 7명의 이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석태수 대표가 오는 3월 임기를 마친다. 석 대표는 그동안 조양호 회장의 대표적인 측근으로 꼽혀온 만큼 재선임이 불발될 경우 총수일가의 경영활동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대한항공은 조양호 회장이 석 대표와 같은 기간 임기가 만료된다. 국민연금이 임기가 만료되는 두 회사 임원의 재선임 안건이 올라올 경우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강도를 더 높이면 한진칼에선 조양호 회장(2020년 3월 임기 만료)에 대해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고차방정식 풀어야 하는 한진칼‧대한항공
한진칼과 대한항공은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대해 아직 공식 입장은 내지 않고 있지만 셈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국민연금 방침은 물론, 두 회사의 상황이 각각 다른 만큼 각종 변수까지 겹쳐 고차방정식을 풀어내야 한다.
대한항공의 주주 구성을 보면, 한진칼이 29.96%로 최대주주다. 조양호 회장 등 특수관계인을 합치면 지분은 33.34%다. 국민연금은 11.56%를 갖고 있는 2대 주주이고, 공개 의무가 없는 소액주주와 5% 기관투자자의 지분은 총 55.09%다. 국민연금과 소액주주, 기관투자자들의 표가 모이면 조 회장 등의 재선임 안건이 부결될 수 있다.
IB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때처럼 한진그룹의 임직원이 직접 나서서 주주들을 설득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시 삼성 고위 임원들은 주주총회를 앞두고 소액 주주들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다. 최근까지도 일부 직원들과 주주들이 공개적으로 불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항공이 전면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겠냐는 기대감도 있다. 반대로 대한항공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아도 우호지분과 총수일가 지분을 합치면 50%가 넘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민연금과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 회사 안팎의 부정적 시각 등이 겹쳐 오는 3월 주총을 앞둔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사진=박정훈 기자
한진칼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한진칼의 지분도 조 회장 측이 28.93%를 갖고 있지만, ‘강성부 펀드’로 알려진 행동주의 펀드 KCGI가 10.71%로 2대 주주에 올라 있다. 국민연금은 7.34%로 3번째고, 크레딧스위스와 한국투자신탁운용이 각각 3.92%, 3.81%를 갖고 있다. 나머지 45.29%는 소액주주와 5% 미만 기관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다. 한진칼 주총은 특히 강성부 펀드 탓에 관심이 집중된다. KCGI도 국민연금과 같이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설 전망이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한진칼 주총은 이사 재선임·해임과 같은 주주제안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며 “한진칼만 주주제안을 할 경우 국민연금과 KCGI는 찬반 의사만 밝히면 되는 만큼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그러나 국민연금과 KCGI가 같은 주주제안을 하거나, 다른 주주제안을 할 경우 결과도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두 곳이 같은 주주제안을 하면 사실상 국민연금과 KCGI ‘연합군’이 결성되는 셈이라 한진칼 입장에선 불리하고, 반대로 양 측이 각각 다른 주주제안을 내놓으면 표가 분산되면서 다소 유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밖에 의결권 자문기관도 또 다른 변수다. 주총 안건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권고하는 기관인데, 주총이 열리기 전 일반에 내용을 공개해 의사결정을 돕는다. 국내 대표기관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서스틴베스트, 대신지배구조연구소다. 해외에는 ISS, 글라스 루이스 등이 있다. 자문 기관의 권고는 앞서의 소액투자자나 지분 5% 미만의 기관투자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한진그룹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대해)그룹 내에서 방침을 정하거나 대응책을 정한 건 없다. 향후 상황을 지켜보며 적절한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