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라는 지위를 이용해 360여 명을 성추행 및 성폭행한 래리 나사르는 법정에서 징역 36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AP/연합뉴스
“아마도 나사르는 미 역사상 최악의 아동 성추행범일 것이다.”
2018년 2월, 나사르를 기소한 안젤라 포빌라이티스 검사는 법정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또한 “경쟁이 심한 체조계가 나사르에게 ‘완벽한 범죄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이는 피해 선수들이 그를 ‘신’처럼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면서 그동안 소녀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침묵했던 미체조협회에도 일침을 가했다.
나사르가 국가대표팀 주치의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저지른 부당 행위는 30년 동안 지속됐으며, 그에게 성추행 및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무려 360여 명에 달했다. 이는 미 스포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추문 스캔들임에 틀림없었다.
나사르가 손쉽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까닭은 치료 행위를 가장하여 어린 소녀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된 범행 장소는 훈련캠프, 체육관, 나사르의 집, 미시간주립대학 등이었다. 당시 대부분이 미성년이었던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사르는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온 선수들을 침대에 눕힌 후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신체 부위를 여기저기 더듬는 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가슴이나 엉덩이, 음부를 더듬는 일은 다반사였고, 심한 경우에는 음부나 항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이런 행위를 하면서도 선수들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만일 방 안에 학부모들이 있는 경우에는 부모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 침대 시트로 가리거나 혹은 자신의 몸으로 가려 가면서 범행을 저질렀다. 훗날 법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은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선수들은 이런 일을 당해도 부모나 코치들에게 쉽사리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우선 나사르를 신뢰하고 있었던 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엘리트 체조선수들은 나사르가 주기적으로 사탕이나 올림픽 기념품을 건네는 식으로, 혹은 칭찬을 늘어놓는 식으로 자신을 믿도록 세뇌했다고 증언했다.
30년 동안 지속됐던 나사르의 범행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16년 가을이었다. 지역 일간지인 ‘인디애나폴리스 스타’가 체육계 성추문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폭로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신문은 선수들을 학대한 것으로 의심되는 50명의 코치 명단을 미체조협회가 보관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지속적으로 학대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체조협회가 그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공개 비난했다. 또한 그간 스포츠 이사회가 코치들의 성추행 의혹을 어떻게 은폐해왔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도했다.
맥카일라 마로니는 13세 때부터 나사르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나사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익명의 체조 선수 두 명은 ‘인디애나폴리스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사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특히 ‘골반저부 물리치료’라고 부르는 시술을 받는 도중에 치욕적인 일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두 선수는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제이미 댄츠셔와 레이첼 덴홀랜더였다. 덴홀랜더는 증인으로 나선 법정에서 나사르가 2000년 한 해 동안 다섯 차례 진료를 하면서 자신의 몸을 더듬는 식으로 성추행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덴홀랜더의 나이는 15세였다.
두 선수의 용감한 폭로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었다. 2017년 2월, 추가로 세 명의 선수들이 ‘60분’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사르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들은 텍사스주 헌츠빌 인근의 카롤리 랜치에 있는 국가대표팀 훈련 캠프에서 나사르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으며, 당시 캠프 내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추행 사실을 폭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2012년 런던올림픽 체조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맥카일라 마로니는 트위터를 통해 13세 때부터 나사르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마로니는 “나사르는 정신치료 요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성추행했다. 그날 밤 난 죽고 싶었다”면서 “그 후로도 그는 수년간 나를 성적으로 학대했다. 열다섯 살 때는 수면제를 먹인 뒤 성폭행했다”라고 주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16년 리우 올림픽 4관왕이자 ‘체조의 여왕’으로 불리는 시몬 바일스 역시 나사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영웅이기도 한 바일스는 2018년 1월, 법정에서 “나 역시 치료를 가장한 성추행을 당한 수백 명의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추악한 범행을 저질러온 나사르에 대한 법원의 태도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2016년 범행 사실이 줄줄이 폭로된 후 여러 기소 사건으로 법정에 서게 된 나사르에게 각 해당 지역의 법원은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가령 2017년 12월, 연방법원은 아동 포르노 소지 및 소지 시도 혐의로 징역 60년을 선고했다. FBI 조사에 따르면 나사르는 당시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3만 7000장에 달하는 아동 포르노 사진과 동영상을 보관했다.
리우 올림픽 4관왕인 시몬 바일스 역시 나사르의 피해자였다.
이보다 앞선 2017년 11월에는 잉햄 카운티와 이튼 카운티 법원이 각각 일곱 건, 세 건의 성범죄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150명이 넘는 선수들이 법정에서 증언했으며, 여기에는 엘리트 체조선수들, 육상선수들, 다이빙 선수들, 수영 선수들 등 여타 운동선수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미시간주 랜싱 법원도 최소 40년에서 최대 175년형을 추가 선고했다. 당시 법정에 선 증인들 역시 100명이 넘었다. 나사르는 랜싱 지역에서 일곱 명의 선수들을 성폭행했으며, 범행 장소는 자신의 집 지하실이나 대학 사무실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포함돼 있었다.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당시 판결문을 통해 “당신을 처벌하는 것은 나의 명예이자 특권이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나올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당신의 행동은 명확하고, 계산적이고, 교묘하고, 기만적이고, 비열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사는 “나는 지금 당신의 사형집행장에 서명한 것과 다름없다”면서 “당신에게 선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라고 덧붙였다. 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당시 법정 안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주일 후에는 비슷한 혐의로 기소된 다른 법정에서도 유죄가 확정되면서 최대 125년의 징역형이 추가됐다. 미시간주 이튼 카운티 법정에서 나사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들은 60명이 넘었다.
이에 나사르는 총 360년의 징역을 살게 됐으며, 사실상 이는 종신형과 다를 바 없다. 행여 모범수로 복역해서 연방법원에서 선고한 60년이 55년으로 감형된다고 해도 이미 100세를 훌쩍 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 역시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1600억 원’ 보상 못한 미체조협회 결국 해체 나사르의 충격적인 범행이 알려지면서 발칵 뒤집힌 것은 체조계뿐만이 아니었다. 미 스포츠계까지 충격은 고스란히 전달됐다. 체조협회를 제외하고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는 곳은 미시간주립대학이다. 나사르의 범행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더 많은 피해자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피해자들이 나사르 개인뿐만 아니라 체조협회와 미시간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역시 이런 까닭에서였다. 실제 1990년대 초반부터 나사르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미시간대학은 여러 차례 성폭행 신고가 접수됐는데도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신고하긴커녕 쉬쉬하기 급급했던 것이다. 결국 비난이 쏟아지자 마크 홀리스 체육부장이 옷을 벗었으며, 루 애나 사이먼 총장 역시 압력에 못 이겨 사퇴하고 말았다. 또한 대학 측은 법원으로부터 피해 선수들에게 보상금 명목으로 5억 달러(약 5500억 원)를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5만 명 이상의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대규모 조직인 미체조협회는 나사르를 제대로 관리 및 감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범행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미 전역에서 100건에 달하는 소송에 휘말렸다. 이에 체조협회 이사진 전원이 사퇴했고, 1년 새 체조협회장 자리가 세 번이나 바뀌는 등 대혼란을 겪었다. 이렇게 나사르 스캔들 후 부침을 겪던 미체조협회는 1억 50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달하는 피해 보상금을 지불하지 못해 파산보호 신청을 했고, 결국 2018년 11월 미올림픽위원회는 체조협회를 해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 2년여 동안 체조계에 불어닥친 폭풍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승리에 집착하는 스포츠계의 구조적인 문제가 결국 화를 불렀다고 비난하고 있다. ‘뉴욕매거진’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승리를 최우선시하는 그릇된 인식이다”라고 꼬집으면서 “결국 이로 인해 도덕성이 뒤로 물러났다”고 비난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