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송파 병 예비후보에 등록했던 나경원 원내대표의 홍보물. 지역구 시민 서 아무개 씨는 “처음의 총명했던 이미지가 신선한 충격이어서 이 전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며 ‘일요신문’에 전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판사 출신 4선 국회의원이다. 서울대 법대를 82학번으로 입학했다. 1986년부터 사법시험에 도전해 1992년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4기를 8위로 수료하고 서른둘이 된 1995년 판사가 됐다. 부산과 인천, 서울을 돌며 총 7년 넘게 판사로 재직했다. 마흔이 되기 직전이었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회창 당시 후보의 요청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3년 한나라당 운영위원, 17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을 거쳐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악바리’는 나경원 원내대표를 잘 나타내는 글자다. 하나에 집중해 계속 파내려 가는 우공이산이기도 하다. 이두아 전 의원은 “나경원 선배는 연수원 1년차 때 첫 아이 유나를 출산했다. 학업과 보육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1년차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허나 연수원 2년차엔 도서관 붙박이처럼 공부하더니 그 해 성적을 동기생 가운데 전체 8등으로 마무리했다. 연수원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끄는 등 화제가 됐다. 특유의 인내력과 끈기를 발휘해 이른바 ‘공신’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고 나 원내대표를 소개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려는 근성이 있다고 평가 받는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나 원내대표의 근성을 잘 보여준다. 그에겐 장애인 장녀와 아들 하나가 있다. 나 원내대표는 첫째 딸을 낳고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평생 흘린 눈물의 절반을 흘렸다”고 했다. 그때부터 장애인 인권에 관심을 쏟게 됐다. 다운증후군 자체를 잘 몰랐던 그는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는 등의 좌절을 겪고 하나씩 싸워나가기 시작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2004년부터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92개다. 이 가운데 장애인복지법, 특수교육진흥법 등 장애인 관련법 개정을 진두지휘한 것만 17개에 이른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장애인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세심하게 돌봤다. 부모가 없는 장애인이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관리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는 ‘장애성년 후견법안’이 나 원내대표의 작품이다.
법만 건든 게 아니다. 대외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국회의원과 장애아 부모 및 전문가 등이 의견을 나누는 모임 ‘장애 아이, We Can’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한나라당 시절에는 장애인복지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올라 장애인 처우 개선과 복지•인권 분야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수장을 맡은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 대회를 지적장애인 선수와 비장애인이 하나되는 행사로 만들었다. 발달장애인의 인식 전환에 큰 기여를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걷는 행사 ‘투게더 위 워크(Together We Walk)’ 행사를 2012년부터 꾸준히 개최했다.
대외적인 활동뿐만 아니다. 국회의원 회관은 늘 민원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붐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민원인 만나기에 적극적이란 평을 듣는다. 한 장애인은 “민원 때문에 국회를 찾아 나경원 의원실에 간 적 있었다. 나 원내대표의 평소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려 실제 노력한 걸 봤다.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며 “다른 의원은 장애인 인권 이야기를 크게 하고는 전혀 관심 없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는데 나 원내대표에게서 진정성을 봤다”고 했다.
나경원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느끼는 곳에는 악바리처럼 산 하나를 옮기곤 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