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평균고도 해발 480m 이상인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에 최적화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연합뉴스
남한산성은 평균고도 해발 480m 이상인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에 최적화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 둘레가 12.4km에 이르며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도 함께 연결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성곽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군사 지휘를 위한 장대, 포구가 설치된 돈대, 비밀통로인 암문 등을 두었다. 성곽 안쪽에는 넓은 분지가 있어 유사시 임시 수도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왕실·군사·민간·종교 시설이 들어섰다. 국왕이 거처할 ‘행궁’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을 비롯해 좌승당(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 수어청(5군영의 하나) 등이 그것이다. 특히 승군(승려들이 조직한 군대)을 총괄하는 승도청과 7개의 사찰이 성곽 안에 창건됐는데, 이는 남한산성을 짓는 데 8도의 승군이 동원되고, 성을 지키는 역할도 함께 맡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부터 남한산성은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거론돼 왔다. 태종 때 산성의 수축(고쳐 짓거나 보수함) 문제가 제기된 뒤, 세종 시절에는 풍년을 기다려 산성을 수축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선조도 남한산성의 개보수를 신중히 고려했으나 전란 후에 인원과 비용을 많이 투입하기 어려워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했다. 그 후 광해군 시절에 남한산성은 일부 개·보수가 이루어지고, 인조 초기에 본격적으로 수축이 시작된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연합뉴스
인조에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남산산성의 수축을 건의하고 실제 공사를 진행한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서였다. 그는 조정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승군을 동원해 산성을 쌓고 백성을 모아 둔전을 실시해 수만 석의 곡식을 수확하는가 하면 총포 등을 많이 제작해 훗날 인조로부터 “진실로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산성을 수축한 지 1년 후 후금(청나라의 전신)이 1차 침공한 정묘호란(1627년) 때 남한산성은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후금 군대가 평산까지 진격하자 놀란 인조와 조정이 몽진한 곳은 다름 아닌 강화도였다. 이는 해구(海寇, 바다로 침입하는 도적떼)가 침략하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고, 육적(陸賊, 땅으로 쳐들어오는 도적떼)이 오면 강도(江都)로 들어가 항전하는 것으로 정해진 조정의 유사시 ‘매뉴얼’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화의가 이루어져 적군은 남한산성까지 당도하지도 않았다.
화급한 위기를 넘긴 조선의 조정은 다시 망각에 빠졌다.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이 정묘호란 4년 뒤 인조에게 올린 상소를 보면 그 실태가 드러나 있다. ‘인조실록’ 인조 9년(1631) 7월 4일의 기록이다. 이원익은 “국가가 일찍이 대비하지 않다가 적이 침입해오자 비로소 후회하였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는 또 다시 해이해지고 있다”라며 “전날처럼 허둥대지 않을까 걱정되니, 모든 일을 중지하고 오로지 군대에 관한 일에 뜻을 쏟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간곡히 주청했다. 그가 우선적으로 요청한 것은 “강화도의 병기와 양식을 비축하고, 남한산성을 이끌 장수를 구하고 곡식을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결과적으로 그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국왕이 거처하는 남한산성 행궁. 연합뉴스
인조 14년 12월, 청나라 태조(누르하치)가 12만 대군으로 조선을 재차 침공하니 이것이 곧 병자호란이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적군에 의해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마지막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성 안에 비축된 양곡은 채 한 달분도 되지 않았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군중에 양식이 없어 나무뿌리를 캐어 대두와 함께 삶아서 죽을 쒀 나눠 먹었다고 한다. 굶주림과 추위가 심해지는 가운데, 왕자들을 보내 지키게 했던 강화마저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결국 조선은 ‘항복’이라는 막다른 선택을 하고 만다. 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 나루터에서 굴욕적인 ‘군신의 의식’과 함께 11개 조문의 강화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청 태조는 남한산성 전투로 인해 많은 병력을 잃을까 우려해 산성을 둘러싼 채 고사 작전을 폈다. 명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천험의 요새인 남한산성을 공략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빼어난 산성을 보유했으나 조선이 패하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주전·주화로 나뉜 국론의 분열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인조실록 13년(1635) 1월 8일 기록에는 수어사(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청의 으뜸벼슬)가 “남한산성을 쌓은 지 9년 지났는데, 이곳을 지키는 경기 다섯 고을의 군병이 한 번도 연습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산성의 방향과 지킬 곳이 어딘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며 훈련을 시키게 해달라고 주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남한산성이라는 훌륭한 하드웨어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를 활용할 만한 소프트웨어는 준비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산성은 역사적·문화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지난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한산성의 세계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에 깃들어 있는 시대의 아픔과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