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해 8월 ‘2018~2020년 투자·고용 계획’에서 밝힌 평택 2공장 건설 등 반도체 사업 부문 180조 원 투자 계획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정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가 지난해 말 반도체 경기 급랭을 들어 “삼성전자 설비 투자 규모가 20% 넘게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을 뒤엎은 것이다. SK하이닉스 역시 2020년 경기 이천에 M16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한다. 정부와 120조 원을 들여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30나노급 공정을 적용해 생산한 D램. 연합뉴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투자 기조는 향후 반도체 시장이 ‘상승장’으로 전환할 때를 대비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비록 초호황 추세가 주춤하긴 하지만 그럴수록 투자를 통한 생산 능력 확대로 점유율을 더 벌리려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후반 치열하게 전개된 반도체 치킨게임이 재현될 수 있다고 내다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당시 반도체 설비투자 경쟁에서 독일·일본 등 반도체 업체들이 도태됐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자율주행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메모리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 이제 막 시작된 만큼 반도체 시장이 한층 더 커질 것”이라며 “투자기조는 오히려 시장 급랭을 버티겠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2016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은 현재 수요와 가격이 급감하면서 끝났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10%대 급락했다. 반도체 글로벌 시장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잠정실적에서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디램익스체인지는 D램 가격 보고서를 내고 올해 1분기 서버용 D램의 가격이 전 분기보다 20% 이상 떨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꺾이자 중국 반도체 업체 ‘푸젠진화’는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를 등에 업고도 D램 양산 계획을 포기했다. 메모리 반도체 D램이 ‘DDR4 8Gb’ 제품 가격 기준 지난해 10월 말 개당 7.31달러로, 한 달 전 8.19달러보다 10.74%나 하락하면서 생산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 4위 D램 업체인 대만 ‘난야테크놀로지’는 올해 반도체 투자를 절반으로 줄인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유지 기조는 이 같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 흐름과 대조된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 기조 뒤에 정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책임지는 반도체가 역성장으로 돌아선 데 부담을 느낀 정부가 반도체 업체의 투자 기조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투자 축소를 고려하다 투자 유지를 결정한 것으로 안다”며 “국정농단 관련 재판 등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후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직접 “반도체 투자와 공장 증설 등을 챙겨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발(發) 치킨게임이 곧 시작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설비 투자 및 공장 증설에 나서면서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제품 가격을 공격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메모리 반도체 D램과 낸드플래시에서 모두 시장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만 가격 인하에 나서도 후발주자들은 동참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치킨게임이 다시 벌어진다. 실제 지난해 4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하락하자 출고량을 줄였던 삼성전자는 올해 가격을 낮추고 출하량을 늘리는 쪽으로 전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에서 “진짜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 반도체 치킨게임과 같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반도체업계 다른 관계자는 “당시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이 탄탄하게 뒷받침했지만 지금은 없다”면서 “정부 입김에 영향받은 투자 확대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
중국, 반도체 가격 추가 하락 부추긴다 중국이 반도체 양산을 예고하면서 반도체 가격 하락이 계속될 전망이다. 기술력에서는 아직 미흡하지만 중국이 가장 큰 반도체 수요처이니만큼 가격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가격 하락 치킨게임에서 중국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저가·저사양 낸드플래시 생산을 시작으로 반도체 생산을 확대할 전망이다. 중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는 지난해 미국에서 32단 3D 낸드플래시 시제품을 선보였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대량 생산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업계에선 국내 반도체 기업의 주력 상품인 64~72단 3D 낸드플래시와 성능 차이가 크지만, 세계 반도체 수요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이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양산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의 등장이 공급 증가를 부추겨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김영우 SK증권 연구원은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기술력은 세계 1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비교할 때 D램의 경우 7년이지만, 낸드플래시의 경우 3~5년 정도”라며 “중국이 반도체 제조 능력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게 되면 세계 반도체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배동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