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노역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14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노역을 반대하는 시위 장면. 연합뉴스
1월 15일 부산지법 제5형사부(최환 부장판사)는 홍콩에서 사들인 금괴를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맡겨 국내 공항을 경유해 일본으로 몰래 빼돌린 혐의(관세법 위반 등)로 밀수조직 총책 윤 아무개 씨(55)에게 징역 5년을, 운반조직 총책 양 아무개 씨(47)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두 사람에게 각각 벌금 1조 3338억 원과 1조 3247억 원, 그리고 추징금 2조 102억 원을 선고했다. 운반조직 총괄 김 아무개 씨(49)에게도 징역 2년 6개월에 벌금 1조 1829억 원, 추징금 1조 7950억 원을 선고했다.
윤 씨 등은 2014년 일본 소비세가 5%에서 8%로 올라 현지 금 시세가 급등하자 홍콩에서 금괴를 사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빼돌리는 수법으로 시세차익을 노렸다. 2016년에만 연인원 5000명이 넘는 한국인이 항공료를 내주겠다는 이들의 꾐에 빠져 밀수에 동원됐다. 이 같은 방식으로 1년 6개월 동안 시가 2조 원 규모의 금괴 4만 321개를 빼돌려 400억 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겼다.
법원 관계자는 “이들은 형이 확정된 후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노역장에 유치하게 되는데 형법상 벌금 50억 원 이상이면 노역기간은 최장 3년을 넘길 수가 없다”고 밝혔다.
윤 씨 등의 벌금액수를 볼 때 이들이 3년 동안 노역에 처해진다면 일당 13억 원, 시급 1억 5000만 원가량이 된다. 이른바 사상 최대 ‘황제노역’이 되는 것이다.
#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전두환 아들, ‘청담동 주식부자’까지…
지난해 11월엔 수백억 원대 불법주식거래와 투자유치 사기 혐의로 징역 5년과 벌금 200억 원, 추징금 약 130억 원을 선고받은 일명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 씨(33)가 황제 노역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 씨는 벌금을 낼 돈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하루 일당 1800만 원의 황제노역을 할 예정으로 알려져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황제노역’은 법조계에서조차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황제노역’의 상징으로 불린 사건에는 2008년 508억여 원의 탈세 및 100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있다. 당시 허 전 회장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허 회장은 일당 2억 5000만 원의 203일 노역이면 벌금을 탕감받을 수 있게 됐다.
황제노역 논란이 일었던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 씨와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2010년 허 전 회장의 항소심에서 벌어졌다. 당시 재판부가 벌금을 절반인 254억여 원으로 줄이고 노역 일당은 두 배인 5억 원으로 늘렸다. 노역 기간 역시 1심의 4분의 1가량으로 준 50일 노역으로 벌금을 탕감받을 수 있게 됐다.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준칙을 깨뜨리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불공정이자 특혜성 판결이라고 법원의 판결을 맹비난했다. 짧은 기간 노역으로 때우는 것도 모자라 일당 자체가 일반인들과 너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서민들이 벌금을 내지 않으면 노역장에 유치돼 하루 5만 원에서 10만 원씩 공제받는 것에 비해 1만 배 또는 5천 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심한 불균형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노역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016년 7월 탈세 혐의로 일당 400만 원의 청소노역을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용 씨도 황제노역 논란에 휩싸였다. 전 씨는 2017년 위증 혐의가 벌금 500만 원이 추가되면서 노역 일당이 10만 원으로 책정돼 고무줄 노역일당이란 비난도 더해지기도 했다.
# 황제노역 거듭되는 이유는 환형유치제도의 법적 한계
그럼 이같이 거액의 벌금 미납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황제노역 논란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조계 안팎에서는 형법의 환형 규정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환형유치제도는 재산이 없거나 부족해서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노역으로 환형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벌금을 내기 힘든 빈곤층 등 법적 약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벌금은 판결이 확정된 후 30일 이내 납입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노역으로 대체하는데 노역일은 벌금액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벌금액이 아무리 많더라도 법에 따라 1일 이상 최대 3년 이하까지만 노역장 유치가 가능하다. 따라서 아무리 길어도 3년의 노역만 버티면 거액의 벌금이 사라져 범죄에 대한 처벌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벌금과 함께 선고된 추징금은 노역으로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해 재산이 없다고 버티면 어찌할 방도가 없는 현실이다. 벌금과 달리 추징금은 몰수가 가능한 부동산, 주식 등을 매각해 충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친일재산, 범죄 수익 등을 강제 추징할 수 있는 특별법도 있지만 이 역시 재산이 있을 경우로 악의적인 ‘배째라’식 대응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한다.
지난해 범죄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을 달리 정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이 추진되고는 있지만 현행 총액벌금제를 대처하기엔 아직 무리가 따른다는 분석이다. 현금으로 숨겨 두거나 관련이 없는 제3자 명의로 돌려놓으면 그만인데다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노역장 유치기간을 6년으로 늘리거나 일당 상한액을 100만 원으로 규정하는 형법 개정안은 2년째 국회표류 중이다.
# ‘국정농단’ 최순실·박근혜, ‘다스’ 이명박의 일당 추산해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 씨가 황제노역을 한다면 일당은 얼마일까.
‘국정농단’ 등 수백억 원대 벌금이 선고된 ‘비선실세’ 최순실과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황제노역 가능성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8월 2심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의 경우 각각 징역 25년과 20년, 벌금 200억 원씩이 선고됐다. 만일 이대로 형이 확정돼 노역장 유치 시 일당은 1826만 원이 된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심에서 징역 15년과 벌금 130억 원을 선고받았다. 노역장 유치 시 일당 1187만 원짜리 노역을 하게 된다. 법정 최저시급의 300배가 훨씬 넘는 수준이다. 물론 이는 형이 확정돼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로 벌금을 내면 노역을 하지 않는다. 벌금을 납부할 가능성이 높아 이들이 실제 황제노역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법원 관계자는 “법제처와 법무부간 견해차 속에 고액벌금을 고의로 납부하지 않고 단순노역 업무를 통해 하루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벌금을 탕감받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벌금형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 등 법적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법무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노역장 유치 건별 선고벌금액 분포에서 300만 원 미만이 70.5%에 달하고 100만 원 미만도 27.8%를 기록했다. 이는 환형유치제도가 일당 10억짜리 황제노역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동철 기자 ilyo100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