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일요신문DB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국민은행 노조·위원장 박홍배)는 지난 21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오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예정됐던 2차 파업을 철회하기로 결의했다. 앞서 지난 8일 KB국민은행은 국민은행·주택은행 합병 이후 19년 만에 총파업을 단행한 바 있다.
이번 결정은 국민은행 노사가 잠정합의서를 교환, 임단협 타결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이 2차 파업 계획 철회를 지시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국민은행 노사는 지난 18일 잠정합의서를 교환하면서 임단협이 타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잠정합의안에는 임금피크 진입 시기와 LO(창구전담 직원) 전환 직원 근속연수 인정, 신입 행원 페이밴드(호봉상한제) 등 주요 쟁점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노사가 한 발씩 양보하면서 잠정합의안을 이끌어냈다.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임금피크제 진입 시기에 대해 사측의 주장대로 진입 시기를 부장·지점장은 1년, 팀장급 이하는 6개월 각각 연장하는 대신, 사측이 팀장급 이하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통한 6개월의 연수기간과 소정의 연수지원금을 보장키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종합의에 도달하는 데 걸림돌이 된 것은 페이밴드 관련 문구다. 국민은행 노조는 최종합의 서명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허인 국민은행장이 문구를 수정하자고 하면서 최종합의가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국민은행 노조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후 박홍배 위원장은 허인 행장과 대표자 교섭을 진행, 잠정합의안을 이날 서명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측은 일요일이나 월요일로 미루자고 했다. 이에 지난 20일 오후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박홍배 위원장, 허인 행장이 마주 앉아 마지막 남은 쟁점까지 해소하며, 이날 잠정합의안에 서명하기로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이날 저녁 재개된 대표자 교섭에서 허 행장이 돌연 잠정합의안의 문구를 바꾸자고 입장을 바꿨다는 것.
사측이 문제 삼은 것은 페이밴드 적용 유보에 관한 문구다. 잠정합의안에서 페이밴드에 대해 “노사는 즉시 인사제도 TFT를 구성하고 LO로 전환된 직원의 근속연수 및 페이밴드를 포함한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기로 한다. 다만 2014년 11월 1일 이후 입행한 직원에 대한 페이밴드는 새로운 급여체계에 대한 합의시까지 유보한다”로 정리했다. 사측은 이 문구가 다시 보니 기한이 없어 ‘사실상 폐지’를 의미한다고 이유를 댄 것이다. 이에 박홍배 위원장은 “여기까지 와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냐. 결단해서 서명하자”고 허 행장을 설득했지만 사측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아 결국 잠정합의안 서명에 실패했다고 노조는 설명했다.
노조는 “합의서 문안은 수일간 노사 양측이 작성한 것을 수차례 반복해 확인한 문안이다. 이토록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사측에 항의했다. 사측은 ‘비대위 소위원회 회의에서 해당 내용을 보고 반대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은행 비대위는 허인 행장을 비롯해 경영지원그룹 대표, HR본부장, 부행장 등 8명의 위원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관계자는 “아무리 비대위라 해도 은행장이 확인하고 서명하기로 한 합의서 내용에 부행장, 전무, 상무가 나서 토를 단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결국 윤종규 KB금융 회장이나 지주 임원, 윤 회장의 뜻을 따르는 은행 임원들이 윤 회장의 업적인 ‘페이밴드’에 대한 노사의 해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페이밴드 도입은 이건호 행장 시절인 2014년 10월 결정됐다”며 “윤종규 회장은 결정 이후인 2014년 11월 취임해 페이밴드와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KB국민은행 노조 1차 총파업. 임준선 기자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 1차 파업 당시, 우려와 달리 은행 업무가 큰 혼란 없이 진행됐다. 이에 국민적 관심도 떨어졌고, 여론의 시선도 좋지 않아 파업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국민은행 노조 입장에서는 출구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노조의 이번 주장은 ‘우리는 파업 철회했으니 허인 행장이 결단을 내려라’라고 귀책을 떠넘기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국민은행 노사 갈등은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가 나서면서 일단락됐다. 국민은행 노사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중노위의 사후조정을 신청, 지난 23일 중노위 사후 조정회의에 들어가 나온 조정안을 잠정 수용하기로 한 것.
최종합의에 논란이 됐던 페이밴드 문제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인사제도 TF를 구성, 앞으로 5년간 TF에서 합리적 방안을 찾기로 합의했다. 다만 TF가 종료될 때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2014년 입행 직원에게 적용했던 페이밴드 상한선을 완화하기로 했다.
지난해 9월 임단협 교섭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이다. 노조는 오는 2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친 뒤 정식 서명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2차 파업 외 예고됐던 3차(2월 26∼28일), 4차(3월 21∼22일), 5차(3월 27∼29일) 총파업도 철회될 가능성이 커졌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