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숙 네이버 대표. 고성준 기자
‘유리천장’은 1986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처음 사용한 표현으로, 여성과 소수민족 출신자들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조직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한다. 한국여성노동자회 관계자는 “여성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으나 사내 성차별 행위가 대놓고 이뤄지는 것이 아닌데다 개인들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해 사례 취합이 어려운 면이 있다”며 “유리천장이 작용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임금 차이나 고위직 여성의 비율 등의 결과로 체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유리천장 지수’에서 지난해까지 6년째 최하위를 기록했다. 유리천장 지수는 남성과 임금 격차, 관리직 내 여성 비율, 이사회 내 여성 참여 비율 등 10개 지표를 바탕으로 산출된다.
여성가족부(여가부)의 조사에서도 국내 기업에 유리천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가부 조사에 따르면 2017년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의 임원 중 여성은 454명, 비율로는 3%에 불과했다. 500개 기업 가운데 여성 임원이 0명인 기업도 328개(65.6%)다.
여성 임원이 1명 이상 있는 기업의 비중이 가장 높은 분야는 금융·보험업이다. 2017년 금융·보험업 73개 기업 가운데 33개 기업에서 여성 임원이 1명 이상 존재했다. 비중으로 따지면 45.2%로, 도·소매업 35.1%, 제조업 32.1%, 건설업 21.6%보다 높다. 이를 방증하듯 최근 증권업계에서는 최초의 여성CEO가 등장해 업계의 관심이 쏠렸다. KB증권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박정림 전 KB증권 부사장 겸 KB국민은행 부행장을 KB증권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박 대표는 취임 이후 다수 언론에서 ‘유리천장’에 대한 질문을 받고 “견고한 유리천장을 깨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리벽을 깨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언급한 ‘유리벽’은 여성이 기업의 핵심 업무에서 차단되는 것을 뜻한다. 임금과 승진 가능성이 낮은 일자리에 여성이 편중되는 ‘유리벽’이 곧 승진을 막는 ‘유리천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업은 특히 남성 중심 업권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원도 아니고 대표라면 큰 의미가 있다”면서도 “다만 박 대표가 은행 출신인 데다 계열사로 내려온 건데, 은행이 강한 KB금융지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회의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박 대표의 취임이 상징성을 갖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문화가 강한 금융업계가 빠른 속도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KB증권의 공시를 보면 지난해 9월 30일 기준 54명의 임원 가운데 여성 임원은 박 대표를 포함해 2명으로 3.7%에 불과했다. 타사와 비교해도 높은 수치가 아니다. 오히려 임원 98명 가운데 4명이 여성임원으로 4% 비중을 보인 미래에셋대우보다 낮은 수치다. 같은 시기 키움증권은 36명 임원 가운데 여성 임원은 1명으로 2.7%, 하나금융투자는 33명 가운데 1명으로 3%의 비중을 보였다. 한국투자증권의 경우 임원 44명 가운데 여성 임원은 1명도 없었다.
기업 내 남녀 차별은 승진에 국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 직원 간 급여도 큰 차이를 보였다. 사업 부문별로 보면 리테일 사업 부문에서는 남성 직원 1인당 평균 급여는 1억 800만 원, 여성 직원의 급여는 8300만 원으로 나타났다. 여성 직원의 급여가 남성 직원의 76% 수준이다. 본사관리 부문에서는 여성 직원의 평균 급여액(6100만 원)이 남성 직원(8500만 원)의 71% 수준이고, 본사영업에서 여성 직원의 평균 급여(7700만 원)가 남성 직원(1억 1800만 원)의 65%에 그쳤다.
금융사를 제외한 일반 100대 기업 중 유일하게 여성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곳은 네이버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기자로 IT업계에 뛰어든 후 전문지식을 쌓았으며, 2017년 3월 대표로 공식 취임해 IT업계 최초로 유리천장을 부순 인물로 평가받는다.
IT기업은 비교적 조직문화가 유연하고 젊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유리천장이 없거나 얇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네이버의 공시를 살펴보면 지난해 6월 30일 기준 임원은 7명, 여성 임원은 한 대표 1명에 불과하다. 2017년 임원제도 폐지에 따라 미등기임원 대신 사용하는 개념인 ‘리더’ 7명 중에서도 여성은 1명에 불과했다. 카카오 역시 9명의 임원 가운데 여성 임원은 1명이었다.
다만 급여 차이에서 네이버가 카카오보다 조금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카카오의 경우 남성은 7842만 원, 여성은 5261만 원으로, 여성 직원의 급여는 남성 직원 급여의 67% 수준이었다. 반면 네이버의 1인 평균급여액은 남성 5740만 원, 여성 4938만 원으로 여성 직원 급여가 남성 직원 급여의 86% 수준이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일요신문DB
여성 오너가 수장으로 있는 기업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면세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사업감각을 인정받은 삼성 오너 일가 이부진 사장의 호텔신라는 지난해 9월 30일 기준 24명의 임원 가운데 이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임원이 전원 남성이다. TR부문 여성 직원의 평균 급여는 남성 직원의 67%, 호텔&레저부문 74%로 나타났다.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아산의 경우 수치로만 보면 유리천장이 가장 두꺼운 것으로 조사됐다. 현대엘리베이터의 등기임원 현황을 보면 지난해 9월 30일 기준 7명의 임원 가운데 여성은 현 회장 한 명이다. 미등기임원 27명도 전원 남성이었다. 직원조차 총 2232명 중 여성은 205명으로 9%에 불과했다. 1인 평균 급여액 역시 남성은 5300만 원, 여성은 3400만 원으로 여성 급여는 남성 급여의 64% 수준이다.
현대아산의 경우에도 8명의 임원 가운데 현 회장 한 명만이 여성 임원이었으며, 전체 직원 149명 가운데 여성은 19명으로 12%에 불과했다. 남녀 평균 급여액 차이도 컸다. 남성은 4200만 원, 여성은 2400만 원으로 여성 직원의 급여는 남성 직원의 57% 수준에 그쳤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엘리베이터는 제조업 분야로 소위 ‘노가다’판이다 보니 여성 직원 비중이 작고, 현대아산의 경우 일부 관리직만 남아 여성이 적다”며 “금강산 관광 사업을 할 당시만 해도 1000여 명이 넘는 직원 중 여성 직원이 절반 이상이었지만, 사업이 오랜 시간 중단되면서 연이은 구조조정으로 여성 중심이던 서비스직이 모두 퇴사했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여가부가 국민연금 끌어들인 배경 “성별 다양성 높은 기업이 성과도 높다” 여성가족부가 대규모 공적기금 등의 투자 기준에 여성 대표성 항목 반영을 추진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여성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에 국민연금 등 공적기금을 집중 투자하겠다는 방침이다. 진선미 여가부 장관은 지난 17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밝히며 “복지부와 실무자 협의를 통해 논의하고 있다”며 “주주들은 투명성, 다양성, 의결결정의 합리성을 바라기 때문에 전체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여성 대표성을 반영하는 것이 공적기금의 효과적 운용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여가부가 국민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두고 여성 정책을 실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의원은 “여가부는 해체가 답”이라며 “국민연금은 철저하게 수익률 확보가 투자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가부는 이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바탕에는 성별 다양성이 높은 기업이 성과가 더 높다는 다수 조사와 발표 자료가 있다고 설명한다. 기업의 실적 및 성과가 기업의 성별 다양성 정도와 비례하므로 기금 운용에 성별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 수익률 확보와 무관치 않다는 것. 실제로 모건스탠리인터내셔널(MSCI)은 2016년 기업 이사회에 여성이 있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재무 성과가 높다는 분석을 내놨고, 다국적 컨설팅전문회사 맥킨지앤드컴퍼니는 지난해 1월 보고서를 통해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이 높을수록 영업이익과 장기 가치창출력이 높다고 발표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2017년 ‘아시아의 지속성장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한 국제 콘퍼런스에서 “노동시장에서 성차별을 줄여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끌어올리면 고령화에 따른 부작용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며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을 10% 높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공적기금 운용에서 성별 다양성 요소를 중시하고 있는 추세다. 일본 공적연금(GPIF)은 지난해부터 기금 투자 시 ‘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 일본 여성활약 지수’(MSCI Japan Empowering Women Index)를 투자에 반영한다. 캐나다연금위원회(CPPIB)는 2017년 주주총회 시즌 당시 이사회 구성원 중 여성이 1명도 없는 투자기업에 이사회 의장 선임 반대표를 던졌다. 또 각 기업에 이사회 다양성의 중요도를 설명하고 여성 이사를 늘리도록 권고했다. 여다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