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잠실 롯데전에서 양준혁이 보유하고 있던 통산 2318안타 기록을 8년 만에 넘어선 박용택. 사진 출처 = LG 트윈스 홈페이지
[일요신문] 베테랑 외야수 박용택(40)은 지난 1월 20일 LG와 2년 총액 25억 원에 계약했다. 계약금 8억 원과 연봉 각 8억 원, 옵션 1억 원이 포함된 조건이다. 박용택은 이번 계약이 끝나는 2020시즌까지만 현역 선수 생활을 이어갈 계획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20억원이 넘는 다년 계약을 이끌어낸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부분은 박용택이 선수 생활의 마지막 2년도 LG와 함께한다는 사실이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2년 LG에 입단한 그는 19년간 한 팀에서만 뛰고 명예롭게 유니폼을 벗게 됐다.
#박용택이 LG의 레전드로 남은 이유
예견됐던 결과다. 애초에 박용택이 FA 권리 행사를 신청했을 때부터 LG와 박용택은 서로 “계약하자”는 데 합의가 된 상태였다. 세부 조건 조율이 문제였을 뿐, 박용택의 LG 잔류는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박용택은 명실상부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전설이라서다.
그는 지난 17시즌 동안 2075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9, 2384안타, 210홈런, 1135타점, 308도루를 기록했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7년 연속 150안타를 때렸고, 2009년부터는 10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에는 삼성에서 은퇴한 양준혁을 넘어 역대 KBO 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도 경신했다. 박용택 개인의 야구 인생을 넘어 LG의 역사에서도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무엇보다 최근 수 년 간 소속팀 LG에 거센 세대교체 바람이 불어 닥치고 많은 베테랑 선수가 팀을 떠나는 와중에도, 박용택은 소나무처럼 주전 한 자리를 지켜내면서 여전히 팀의 간판 선수로 군림했다. 세 번째로 맞은 FA 기회 역시 이전 두 번과 마찬가지로 LG 잔류를 택했다. 차명석 LG 단장이 “팀 프랜차이즈 레전드 스타로서 앞으로도 계속 예우와 존중을 해주고 싶다”고 말한 이유다.
선수 생활 2년을 남긴 그에게는 아직 해내지 못한 숙제가 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LG는 1990년과 1994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02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했다. 그 후 아직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은 적이 없다. 2002년 입단한 박용택에게 ‘우승 반지’란 남의 일, 혹은 그림의 떡으로만 여겨졌다. 이제 그에게는 단 두 번의 기회만 남았다. 그는 계약 전에도, 계약 후에도 언제나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고 했다. ‘은퇴할 때까지 LG맨’이라는 목표를 이룬 박용택의 또 다른 소원이 2년 안에 이뤄질지 관심거리다.
#점점 더 커지는 ‘원 클럽 맨’의 가치
그 꿈의 성사 여부와 관계 없이 박용택에게는 2년 뒤 또 다른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KBO 리그에 단 13명밖에 없는 ‘영구결번’이다. 최초는 1986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김영신(OB)의 54번. 이후 1996년 해태 선동열(18번), 1999년 LG 김용수(41번), 2002년 OB 박철순(21번), 2004년 삼성 이만수(22번), 2005년 한화 장종훈(35번), 2009년 한화 정민철(23번)과 한화 송진우(21번), 2010년 삼성 양준혁(10번), 2011년 롯데 고(故) 최동원(11번), 2012년 KIA 이종범(7번), 2014년 SK 박경완(26번), 2017년 LG 이병규(9번)와 삼성 이승엽(36번)이 차례로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13명 가운데 현역 시절 소속팀을 옮겼던 선수는 양준혁, 최동원, 박경완뿐. 이 가운데 양준혁은 데뷔와 은퇴를 모두 삼성에서 했고, 박경완은 입단 당시 소속팀 쌍방울이 해체되면서 불가피하게 유니폼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던 케이스다. 선동열, 정민철, 이종범, 이병규, 이승엽은 모두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한 경험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단 한 구단에서만 뛰었다. 19년을 LG 선수로 남게 된 박용택의 등번호 ‘33’ 역시 김용수의 ‘41’과 이병규의 ‘9’에 이어 LG 역사에 단 한 선수의 이름으로 박제될 듯하다.
한국에서 ‘원 클럽 맨’의 가치는 갈수록 커져가는 추세다. FA 이적이 점점 활발해지고 매년 트레이드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한 팀의 전통을 고스란히 상징할 수 있는 존재가 더 귀해지고 있어서다. 보통 데뷔 후 단 한 차례도 팀을 옮기지 않고 10년 이상 뛴 뒤 은퇴한 선수에게 ‘원 클럽 맨’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하지만 이 조건을 채우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선수의 이적이 온전히 개인의 의사에만 달린 게 아니라서다. 매년 리그와 팀 상황, 선수의 기량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반전도 생긴다. 영원히 한 팀의 상징으로 남을 것 같던 선수가 갑작스럽게 라이벌 팀으로 떠나 팬들에게 충격을 안기기도 하고, 반대로 입단 당시에는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선수가 오랜 기간 꾸준히 활약하면서 한 팀의 전설로 자리잡기도 한다. 아무리 실력과 인기 모두 팀 내 최고를 자랑하는 선수라 해도 하늘이 내려준 인연과 스토리가 없다면 이 타이틀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더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KBO 대표 원 클럽 맨 OB 박철순. 일요신문DB
KBO 리그가 37년 역사를 쌓아 올리는 동안 각 구단도 적지 않은 ‘원 클럽 맨’을 배출했다. 두산은 전신 OB 시절까지 포함해 김광수, 김동주, 김민호, 김태형, 박철순, 장원진, 장호연, 고영민 등이 입단과 은퇴를 모두 베어스에서 한 선수들이다. 이 가운데 김태형은 2015년 두산 감독 자리에 오른 뒤 곧바로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지난해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면서 두 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려 신흥 명장으로 꼽히고 있다. 대표적 프랜차이즈 스타로 꼽히는 홍성흔은두산에서 14년을 뛰었지만, FA로 롯데에 이적한 뒤 4년을 보낸 터라 ‘원 클럽 맨’으로는 남지 못했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에이스로 활약했던 더스틴니퍼트 역시 한 팀에서 가장 오래 뛴 외국인 선수로 기록됐지만, 마지막 1년을 KT에서 보냈다. 니퍼트는 KT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산 선수들과 관계자들에게 눈물의 영상 편지를 보내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LG는 김기범, 김용수, 김정민, 김태원, 노찬엽, 봉중근, 송구홍, 서용빈, 유지현, 이광은, 이병규, 이종열, 정삼흠, 차명석을 보유했다. 이 가운데 김정민은 2006년을 끝으로 은퇴했다가 구단의 요청에 따라 2008년 현역으로 복귀해 3년간 플레잉코치로 활약했던 독특한 이력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LG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거나 과거 코치를 거쳐갔다. 박용택은 2년 뒤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LG 전성기의 상징이었던 이상훈은 구단과 마찰을 빚다 1998년 SK로 이적해 4년을 뛰고 2002년 돌아왔고, 1994년 우승의 주역인 김재현 역시 2005년 SK로 이적해 그 팀에서 은퇴했다.
해태의 역사를 이어받은 KIA는 김봉연, 김상훈, 김성한, 김종국, 김종모, 김준환, 선동열, 유동훈, 이종범, 차영화, 최희섭, 홍세완 등이 ‘원 클럽 맨’에 포함된다. 당연히 타이거즈 유니폼만 입었을 것 같은 이강철은 2000년 FA 자격을 얻은 뒤 삼성으로 이적해 1년 반을 보냈다. 그 후 다시 친정팀으로트레이드돼 은퇴는 KIA에서 했다. 전성기의 영웅 한대화는 1994년 LG로 이적해 트윈스의 ‘우승 청부사’가 됐고, ‘스나이퍼’로 통했던 장성호 역시 15년 타이거즈 생활을 접고 2011년 한화로 팀을 옮겼다.
원년 구단 삼성에도 ‘원 클럽 맨’이 적지 않다. 류중일 현 LG 감독과 김한수 현 삼성 감독이 모두 선수로서는 물론 코치로서도 삼성에만 몸 담았던 대표적 인물들이다. 류 감독 역시 삼성 사령탑을 6년 역임했다. 이 외에도 강기웅, 강명구, 김재걸, 박승호, 이만수, 이승엽, 장태수, 전병호 등이 ‘원 클럽 맨’에 속한다. 모두가 ‘삼성의 레전드’로 기억하는 양준혁은 1999년부터 3년간 해태와 LG를 거치면서 잠시 타향살이를 했다. 하지만 이적 원인이 본인도 원치 않은 트레이드였던 데다 FA가 된 2002년 곧바로 고향 대구로 금의환향해 삼성 팬들의 아낌 없는 환영을 받았다. 삼성의 전성기 멤버로 활약하면서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배영수는 2014시즌이 끝난 뒤 FA가 돼 한화로 팀을 옮겼다. 콜로라도 오승환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삼성에서 뛰면서 KBO 리그 최고 마무리 투수로 군림한 뒤 해외에 진출했다. 국내 복귀시 무조건 삼성으로 돌아오게 돼 있어 향후 ‘원 클럽 맨’으로 은퇴할 1순위 후보다.
롯데는 ‘자갈치’ 김민호, 김용희, 김응국, 박정태, 박종윤, 박현승, 염종석, 유두열, 윤학길, 이우민, 이정민, 조성환 등을 배출했다. 롯데에 영구 결번을 남긴 최동원은 선수 생활 말년을 삼성에서 보냈고, 14년간 롯데에서 뛰던 주전 포수 강민호도 2018시즌을 앞두고 삼성으로 떠났다. 한화는 전신 빙그레 시절을 포함해 강석천, 강정길, 고동진, 구대성, 송진우, 신경현, 이강돈, 이상군, 이양기, 이영우, 임수민, 장종훈, 정민철, 한용덕 등을 선수 생활 내내 독수리 둥지에 품었다. 이 가운데 한용덕은 현재 한화 지휘봉을 잡고 있다. 지난해 팀을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어 박수를 받았다.
2000년 창단한 SK에는 김원형, 박재상, 엄정욱, 조동화 등이 있다. 1991년 쌍방울에 입단한 김원형은 2000년 팀이 해체되면서 SK로 옮겨 2011년 은퇴했다. ‘원 클럽 맨’ 자격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올해 두 번째 FA 자격을 얻은 뒤 SK와 6년 계약을 한 최정은 일찌감치 와이번스의 ‘전설’ 자리를 예약하는 행운을 누렸다. 현대가 공중분해된 뒤 2008년 창단한 히어로즈는 1994년 현대에 입단한 뒤 2011년 히어로즈에서 은퇴한 이숭용을 ‘원 클럽 맨’으로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숭용은 KBO 리그 최초로 단일 팀 2000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한 선수다. 현대의 과거 홈구장을 물려 받은 KT에서 올해 단장 역할을 맡게 된다. 2012년 창단한 NC와 2015년 창단한 KT는 아직 원 클럽 맨을 배출할 만한 역사를 쌓지 못했다. NC에선 팀의 출발과 동시에 입단해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나성범이 향후 가장 유력한 선수다. 박민우와 이재학, 2013년 입단한 임창민도 마찬가지다. KT는 지난해 입단해 신인왕을 휩쓴 강백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입단 전부터 “미래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을 정도다. 일단 강백호의 첫 해는 희망적이다. 선수 생활은 LG에서 시작했지만 KT 창단과 동시에 이적해 팀의 주축으로 활약한 베테랑 박경수 역시 팀 프랜차이즈 스타 못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메이저리그의 대표적 ‘원 팀 맨’이자 ‘최후의 42번’ 리베라가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보여준 위엄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는 1995년 데뷔할 때부터 2013년 은퇴할 때까지 오로지 뉴욕 양키스의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만 입은 대표적 ‘원 팀 맨’이다. 2013년 9월 ‘양키스 소방수’ 마리아노 리베라의 홈경기 고별전. AP/연합뉴스 양키스가 아닌, 메이저리그 전체의 ‘소방수’였다. 19년간 역대 빅리그 통산 최다 기록인 652세이브를 쌓아 올렸고, 포스트시즌에서도 42세이브를 해냈다. 일곱 번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아 다섯 번이나 우승 반지를 끼었다. 리베라의 등장 음악인 메탈리카의 ‘샌드맨’이 울려 퍼지면 야구장 공기가 달라졌고, 상대 팀 타자들은 리베라가 마운드에 올라오기 전에 승부를 보려다 헛스윙을 연발했다. 최고 명문 구단에서 오랜 기간 수호신으로 군림한, 진짜 ‘레전드’다. 이뿐 아니다. 리베라는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2번’ 선수였다. 42번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서 모두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번호다. 1947년 최초의 흑인선수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재키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그의 데뷔 50주년인 1997년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일하게 42번을 달고 있던 리베라에게만 한시적으로 42번을 허용했고, 리베라가 은퇴하면서 이제 42번은 진정한 불가침의 영역이 됐다. 빅리그 역대 최고 소방수에 걸맞은 스토리다. 양키스는 로빈슨의 42번과 별개로 ‘리베라의 42번’을 따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리베라의 업적을 기념했다. 2013년 진행된 리베라의 ‘은퇴 투어’ 역시 역대 최고 소방수의 마지막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 시즌 내내 양키스의 홈경기와 원정경기 관중석은 꽉 들어찼다. 리베라의 마지막 투구와 작별 인사를 직접 보기 위해 미국 전역의 야구팬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미네소타에서는 부러진 야구 배트들로 만들어진 의자를 선물 받았다. 그 의자는 세계 최고의 구종으로 꼽히는 리베라의 컷패스트볼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던 수많은 배트들을 상징한다. 또 보스턴에서 치른 마지막 원정경기에서는 평생 양키스에 이를 갈며 살아온 숙적 보스턴의 극성팬들 조차 리베라에게 기립박수를 치는 장관이 연출됐다. 리베라가 마지막 양키스타디움 경기에서 교체되던 순간에는 투수코치 대신 앤디페티트와 데릭지터가 마운드에 올라와 포옹을 나눴다. 은퇴식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비운 채 오직 리베라 한 명만 마운드에 올라섰다. 한 명의 선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그런 리베라가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또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은퇴한 지 5년이 지나 명예의 전당 입회 자격을 얻은 그는 첫 번째 도전이던 1월 23일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 투표에서 투표인단 425명에게 모두 표를 받아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BBWAA 명예의 전당 후보 투표에서 만장일치가 나온 건 투표가 시작된 1936년 이후 83년 만에 처음이다. ‘만장일치 입회’는 그동안 그 어떤 레전드도 깨지 못한 벽이었다. 리베라 이전 최고 득표율은 2016년 ‘철인’ 켄그리피 주니어가 기록한 99.32%. 약물의 시대에 양심을 지킨 ‘깨끗한 타자’로 존경 받았던 그리피 주니어조차 440표 중 딱 3표가 모자란 437표를 받았다. 홈런의 제왕 베이브루스가 95.1%, 마지막 4할 타자 테드윌리엄스가 93.4%를 각각 기록했을 정도다. 하지만 리베라는 이상한 트집을 잡아 반대표를 던져오던 일부 기자들의 괴팍한 ‘돌출 투표’마저 잠재웠다. ‘100’이라는 완벽한 숫자로 또 한 번 메이저리그에 신기원을 열었다. 리베라와 함께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 동료 데릭지터는 “인류 역사에서 달 위를 걸은 사람(12명)이 포스트시즌에서 리베라에게 자책점을 뽑아낸 선수(11명)보다 더 많다”면서 “나는 역대 가장 위대한 마무리 투수를 가장 좋은 자리에서 지켜보는 특권을 누렸다”는 말로 깊은 존경이 담긴 헌사를 보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