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예로부터 명절에 성묘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시대가 지나면서 성묘객이 줄어들고 있지만 조상님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는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회장들이 제사 때 창업주의 산소를 찾아가는 일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일요신문’은 설 명절을 맞아 주요 대기업 창업주들의 묏자리를 살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산소는 경기도 용인시에 자리하고 있다. 호암미술관 내부에 위치하고, 바로 옆에는 에버랜드가 있어 앞뒤로 삼성의 기운을 받고 있는 셈이다. 해당 토지 소유주는 삼성물산으로 회사 땅에 개인 묘지를 조성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남시 창우동에 위치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묘. 사진=최준필 기자
다른 대기업 회장들은 대부분 가족 묘소를 쓰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산소가 위치한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에는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 아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산소도 같이 있다. 이곳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정몽준 아산복지재단 이사장,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일 현대미래로 회장 등 5인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회사는 분리됐어도 아버지는 같이 모시고 있는 셈이다.
한화그룹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고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의 묘는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다. 이곳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소유였지만 2005년 토지 지분의 절반을 동생 김호연 빙그레 회장에게 증여했다. 김승연 회장과 김호연 회장은 한때 경영권과 재산 분할을 놓고 소송까지 진행하는 등 대립 관계였다.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건 SK그룹 회장의 산소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다. 최종건 회장의 동생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아들 고 최윤원 SK케미칼 회장의 묘도 같은 곳에 있다. 이곳은 최신원 SKC 회장,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 최영근 씨(고 최윤원 회장 아들) 등 3인이 공동 소유 중이다.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묘소는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구인회 창업주의 부친인 구재서 옹의 묘도 인근에 있다. 이곳의 소유주는 ‘능성구씨 도원수공파 제24세 조춘강공 종중’이다. 다만 지난해 별세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 후 유해를 곤지암 인근에 묻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대기업 창업주들 묘소 위치. 그래픽=백소연 기자
묘소 선택에는 대개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친다.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묘소가 이병철 회장이 있는 용인시가 아닌 경기도 여주시인 것도 풍수지리를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석우 대한풍수문화연구소 소장 겸 용인대학교 교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묘를 잘 쓰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보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도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측면으로 봐야할 것 같다”며 “대기업치고 풍수지리를 안 보는 곳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라고 전했다.
주요 대기업 창업주들의 묏자리가 경기도에 많이 위치하는 것도 풍수지리를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고 이재준 대림그룹 창업주, 고 장병희 영풍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고 이회림 OCI그룹 창업주 등의 묘소가 경기도에 있다.
고향에 묏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할아버지인 고 허만정 LG그룹 공동 창업주는 고향인 진주시에 묘소가 있다. 토지 등기부 상 허만정 창업주의 묘소 소유주는 ‘허지신 종중’으로 기재돼 있다. 광주광역시가 고향인 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묘도 광주에 있다. 박인천 창업주 묘소 소유주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박재영 씨(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 회장 아들), 박철완 씨(고 박정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아들) 등 4인 소유다.
최근 부동산 가격 상승을 생각하면 묏자리의 토지 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주영 명예회장 묘터의 개별공시지가는 2010년 ㎡ 당 1만 3200원에서 2018년 1만 7800원으로 올랐다. 같은 기간 최종건 회장의 묘터는 ㎡ 당 1만 3500원에서 1만 6400원으로, 구인회 회장의 묘터는 2만 700원에서 3만 1500원으로 올랐다.
부지 매각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부동산으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2010년 10월, 아시아나항공은 박인천 회장 묘소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12억 원을 대출받은 바 있다. 4분의 3에 해당하는 박삼구 회장, 박찬구 회장, 박철완 씨의 지분이 담보로 잡힌 것이었다. 2010년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은 동시에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의 경영권 대립이 가시화된 시점이었다.
최근에는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묘소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가압류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중훈 회장 묘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 조유경 씨(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딸) 등 4인 소유다. 여기서 조양호 회장의 지분 4분의 1이 가압류 된 것이다.
지난해 10월,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조양호 회장이 차명으로 약국을 운영하면서 1522억 원 상당의 급여를 부당하게 타냈다는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조 회장을 상대로 부동산 가압류를 신청한 것이다. 현재 조 회장의 평창동 주택도 가압류 된 상태다.
대기업 회장들이 이번 설에 성묘를 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주요 대기업 관계자들은 성묘와 관련해 “회장의 개인적인 일이라 알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성묘 여부와 관계없이 조상을 좋은 곳에 모시고 싶은 마음은 대기업 일가도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묘소가 대출 담보로 활용되는 등 순수성에 의심이 가는 상황도 적지 않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