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캠프 현장에서 결의를 다지는 KIA 타이거즈. 사진=KIA 타이거즈 홈페이지
[일요신문] 스프링캠프는 한 시즌의 성적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매년 2월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10월의 성적표가 달려 있다. 일반인들이 여행을 떠나고 휴가를 즐기는 지역에 캠프를 차리지만, 선수들에게는 모든 게 그림의 떡일 뿐. 캠프 시작과 동시에 사실상 진짜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1월 30일과 31일 이틀로 나뉘어 전 구단이 스프링캠프지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2월 1일부터 일제히 새 시즌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SK가 미국 플로리다, NC와 키움이 미국 애리조나, LG가 호주, 롯데가 대만, 두산·한화·삼성·KIA가 오키나와로 각각 향했다. 미국과 호주로 떠난 팀 대부분은 2월 말 일본으로 캠프지를 옮겨 실전 위주 2차 캠프를 준비할 예정이다.
#해외 전지훈련은 어떻게 시작됐나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2년째인 1983년 처음으로 해외 전지훈련을 시작했다. 4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국에선 추운 겨울에 프로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가장 먼저 해외로 떠난 팀은 원년 우승팀인 OB. 당시 새로 개장했던 이천구장 실내훈련장과 그라운드에서 기초 체력훈련을 하다 그해 1월 30일에 대만의 가오슝으로 떠났다. 또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와 미야자키에서 2차 캠프를 진행했다.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와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일본 프로 선수들과의 맞대결을 경험하기도 했다. 삼성·해태·롯데는 모두 일본으로 향했다. 특히 롯데는 일본 가고시마에서 자매구단인 롯데 오리온스와 합동 훈련을 진행하면서 일본 선수들의 선진 훈련 문화를 바로 옆에서 보고 배웠다.
원년 6개 구단 가운데 해외로 전지훈련을 가지 못한 두 팀은 삼미와 MBC. 삼미는 당초 해외 스프링캠프 계획을 세웠다가 나중에 취소하고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선수들의 훈련 장소를 만드는 고육지책을 썼다. 이유는 단 하나. 돈이 부족해서다. 프로 첫 해 꼴찌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천 야구의 대부인 김진영 감독을 맞아 들였다. 또 재일교포 선수인 장명부를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몸값이었던 연봉 1억 원에 데려왔고, 선수 13명도 추가 영입했다. 스카우트 비용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예산이 부족해졌다. MBC는 아예 처음부터 해외 전지훈련을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나마 따뜻한 경남 진해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후 전지훈련지는 괌, 사이판, 필리핀 등으로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구장을 훈련장소로 택한 구단은 1985년의 삼성이다. 삼성은 당시 이건희 구단주가 엄청난 투자를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패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급기야 구단주 지시 아래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LA 다저스가 스프링캠프를 치르는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로 날아갔다. 이건희 구단주가 1982년 10월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를 직접 만나 약속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후 애리조나와 플로리다, 하와이가 국내 구단들의 단골 전지훈련지가 됐다. 일본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오키나와가 각광받는다.
#초창기 캠프의 애로사항은?
초창기 프런트들은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기 위해 챙겨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았다. 선수단 지원부서 전원이 3개월 이상 매달려 준비해야 할 정도였다. 일단 해외에 나가려면 선수 전원이 서울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소양 교육을 거쳐야 했다. 신원조회 역시 필수. 군 미필 선수들은 병무청으로부터 해외여행 허가서도 발급받아야 했다. OB는 원년 우승 직후 선수들의 요청에 따라 미국 전지훈련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선수단 전체가 미국 비자를 받는 게 너무 어려워 끝내 포기하기도 했다.
뜨거운 스프링캠프 열기. 사진=한화 이글스, (구)넥센 히어로즈
그러나 일단 훈련이 시작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일본 구단들의 캠프를 보고도 놀랐던 한국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는 더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겼다.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체계적인 시설과 극진한 대우, 맹훈련과 고급 기술 대신 끊임없이 ‘기본’을 강조하는 다저스 코치들의 지도방식은 선수들에게 별천지이자 자극제였다.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당시 다저타운에서 보낸 스프링캠프가 이후 삼성이 명문구단으로 자리 잡는 초석이 됐다”고 평가할 정도다.
메이저리그 캠프를 체험하고 돌아온 삼성은 그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이후 많은 구단은 점차 일본을 넘어 미국으로 스프링캠프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때 일본 전지훈련은 파친코와의 싸움
일단 캠프를 떠나면 그 다음은 ‘무탈’한 마무리가 중요하다. 타국에서 가족과 친구도 없이 운동만 하면서 두 달 남짓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혈기왕성한 선수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하늘로 치솟기 마련. 그로 인한 사건·사고로 알게 모르게 고생하는 팀이 더 많다.
수 년 전 한 구단은 미국 애리조나 1차 캠프를 마치고 오키나와로 둥지를 옮겼다. 밤낮이 바뀐 시차와 긴 이동거리에 적응하느라 선수들의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A 감독도 도착 첫 날 간단히 몸만 풀게 한 뒤 ‘무조건 휴식’이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루빨리 컨디션을 회복해야 남은 훈련의 능률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피곤에 젖은 선수들도 일찌감치 각자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안심한 A 감독은 가족에게 모바일 메신저로 도착 인사를 전하기 위해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호텔 로비로 향했다. 그때 호텔 앞으로 콜택시 한 대가 들어와 멈춰서는 게 보였다. 선수 시절부터 코치 시절까지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어본 A 감독이다. 곧바로 ‘촉’이 왔다. 호텔 앞에 서 있던 다른 택시에 올라타 기사에게 “앞 택시에 사람이 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자를 푹 눌러쓴 B 선수가 빠른 걸음으로 나타나 콜택시에 올라탔다. 평소 감독이 “다 좋은데 유흥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고 한탄하던 선수였다. 감독이 탄 택시는 조용히 B 선수의 콜택시 뒤를 쫓았다. 행선지는 감독의 예상대로 일본의 유명 도박게임인 파친코 영업장 앞이었다. 눈이 잔뜩 충혈되고도 파친코를 위해 잠을 포기한 B 선수가 입구로 향하는 순간, 뒤에서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 내일 당장 짐 싸!” 실제로 감독은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구단 매니저를 불러 한국행 비행기표 한 장을 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B 선수가 다음 날 아침 감독의 방에 찾아가 싹싹 빈 뒤에야 귀국 조치도 철회됐다.
실제로 일본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파친코는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치르는 구단들에게 가장 골칫거리다. 일본 어디에든 파친코 영업장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다. 물론 파친코는 합법적인 게임이다. 적당히 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나쁠 것도 없다. 대부분은 야간훈련이 없는 휴식일 전날 밤이나 휴식일 당일 낮에 영업장을 찾아 가볍게 파친코를 즐긴다. 그러나 늘 일부 ‘지나친’ 선수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승부욕 강한 프로야구 선수들이 돈을 잃기 시작하면 결말이 안 좋아진다. 몇 년 전 C 선수가 그랬다. 하필이면 C 선수의 소속팀이 훈련하던 구장에서 도보 5분 거리에 파친코 영업장이 문을 열었다. 잃은 금액이 점점 커지자 C 선수는 급기야 훈련 도중 점심식사까지 거른 채 파친코를 하러 달려갔다. 나중에는 연습경기 도중 사라져 문제를 키웠다. 게다가 파친코 기계에 무력으로 화풀이를 하다 가게 종업원과 주먹다짐까지 벌였다. 구단이 사태를 무마하느라 애를 먹었다. C 선수는 오래지 않아 은퇴했다.
파친코 때문에 선수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D 선수는 연봉이 3000만 원밖에 안 되던 시절 전지훈련에 참가했다가 파친코의 마력에 빠졌다. 수중의 돈이 다 떨어지자 같은 팀 고액 연봉자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려 도박을 계속 했다. 귀국할 때쯤에는 석 달 치 월급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시범경기 내내 다른 지인들에게 돈을 꿔서 동료들에게 빌린 돈을 돌려 막느라 바빴다. 그때 고생한 기억 덕분에 연봉이 많이 오른 뒤 오히려 파친코를 끊었다. D 선수는 “나처럼 늦게라도 돈을 다 갚는 선수는 그나마 양반이다. 일부 고참 선수들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에게 돈을 빌려 파친코를 한 뒤 입을 싹 씻기도 했다”고 혀를 찼다.
#전설로 남은 ‘주사’ 에피소드들
물론 도박보다 더 많은 사고를 일으킨 건 바로 ‘술’이다. 각 구단 별로 여전히 술자리마다 화제에 오르는 대표적인 스프링캠프 주사 에피소드 리스트가 있을 정도다. E 선수는 입단 당시부터 구단의 기대를 많이 모았다. 이른바 ‘하드웨어’라 부르는 체격도 좋고 재능도 빼어났다. 그러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늘 사고를 쳤다. 소속팀을 몇 차례 옮겨야 했던 가장 큰 원인도 술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애리조나 캠프에서 벌어졌다.
E 선수는 훈련을 마치고 인근 한국 술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신 뒤 다시 택시를 타고 또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소변을 참기 힘들어졌다. 적당히 어두운 기둥 뒤에 서서 노상방뇨를 시작했다. 하필 그 장면이 현지 경찰에게 적발됐다. 영어를 전혀 못 했던 E 선수는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랐다. 손짓 발짓을 섞어 보디랭귀지로 소통을 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가 팔을 휘두르자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총을 꺼내들고 ‘손들어!’를 외치며 E 선수를 포박했다. 결국 구단 직원이 잠을 자다 말고 혼비백산해 경찰서로 달려가야 했다. 다행히 E 선수는 무사히 훈방됐지만, 다음 날 보고를 받은 감독은 노발대발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팀 훈련 분위기도 잔뜩 가라앉았다.
한국식 술집이 많은 하와이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다. 은퇴한 F 선수가 심야 음주 폭력사건에 휘말린 뒤 긴급 출동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공무집행 방해와 폭행 혐의로 법정에 선 것은 유명한 일화다. F 선수의 당시 소속팀은 이듬해부터 더 이상 하와이로 전지훈련을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캠프가 모두 끝난 귀국 전날은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가장 긴장하는 날이다. 힘든 일정을 무사히 마친 선수들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다 보면 주량을 제어하기 어려워져서다. G 선수 역시 “오늘은 특히 몸조심하라. 내가 지켜보겠다”는 감독의 경고를 무시하고 깊은 새벽에 만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왔다. 문제는 서슬 퍼런 감독이 호텔 로비에 앉아 정말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G 선수는 눈앞에 서 있는 감독의 얼굴조차 몰라본 채 방도 아닌 로비에 그대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그는 귀국 직후 2군으로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드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비활동기간 준수’ 자율훈련의 새 풍경 12월은 오래전부터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휴가’로 여겨졌다. 1월은 얘기가 다르다. 1월에 단체 팀 훈련이 아예 사라진 것은 올해가 불과 세 시즌째다.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팀들이 1월의 절반 이상을 스프링캠프에 할애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비활동 기간(12월과 1월) 준수’를 놓고 오랜 기간 투쟁한 끝에 ‘스프링캠프 2월 시작’이라는 결과물을 얻어 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는 오래 전부터 2월에 스프링캠프를 개시했다. 특히 메이저리그 야수들은 2월 중순을 넘겨야 캠프에 합류한다. 하지만 KBO 리그는 캠프 시작일이 1월 초에서 15일로 밀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2월부터 시작하는 스프링캠프는 단순히 날짜가 늦춰진 것 이상의 변화를 체감하게 했다. 사실 시행 전엔 감독과 코치들의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비활동 기간이 잘 지켜지던 초창기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어서다. 당시 선수들은 지금처럼 몸 관리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했다.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정말 ‘휴식’을 취하다 캠프에 왔다. 2월 1일에 훈련이 시작되어도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려면 며칠이 그냥 흘러갔다. 특히 투수들은 전력으로 공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야수들 역시 술과 과식으로 불어난 체중을 캠프에 와서야 빼기 시작했다. 선수단 전체가 훈련다운 훈련을 하려면 2월 하순은 돼야 했다는 게 야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망신도 많이 당했다. 일본 1군도 아닌 1.5군 선수들과의 연습경기에서 힘도 못 써보고 압도당하는 일이 잦았다. 일본 선수들은 당시 이미 요즘의 한국 선수들처럼 완벽하게 준비된 몸으로 캠프를 시작하곤 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 차도 원인이었지만, 이제 갓 프로로 걸음마를 뗀 한국 선수들의 몸 상태와 더딘 훈련 페이스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지금의 선수들은 과거와 많이 다르다. 첫 해 캠프에서는 일부 “몸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선수들이 나왔지만, 이듬해부터는 이런 평가가 쏙 들어갔다. 오히려 캠프 첫 날부터 불펜피칭을 하고 배트를 잡으면서 본격적인 기술 훈련을 시작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자율 훈련’의 필요성을 선수 대부분이 확실하게 인식한 덕분이다. 해외에 따로 차리는 ‘개인 캠프’도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는 11월 열리는 프리미어12 여파로 역대 가장 이른 3월 23일에 시즌을 개막된다. 새해가 밝자마자 주전급 선수들의 ‘출국’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1월에는 한국보다 괌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한국 선수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뿐 아니다. 올 시즌 직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NC 나성범은 미국 LA에 있는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의 트레이닝센터에서 훈련했고, 두산 박세혁은 일본 명문 구단 요미우리의 레전드 포수 아베 신노스케와 괌에서 동반 훈련을 했다. 두산 오재원은 지난해 도움을 받은 외국인 코치 덕 래타에게 다시 레슨을 받기도 했다. 후배들을 모아 함께 떠나는 선배 선수들이 많아진 것도 새로운 풍경이다. 스프링캠프 개시일이 2월로 밀린 뒤, 겨울 훈련 비용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저연봉 선수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고액 연봉 선수들은 친한 후배 몇 명과 해외 자율 훈련에 동행한 뒤 숙소를 함께 쓰고 밥을 사 주면서 ‘훈련 파트너’가 돼 주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비행 시간이 길고 시차가 큰 미국에서 훈련하는 팀들은 선수가 출국 날짜를 조절해 먼저 현지에 도착한 뒤 1월 체류비만 개인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단점을 보완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