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의원실에서 선거제도개편 논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심상정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1990년대 중반부터 심상정 의원은 노조 사이에서 구심점이 됐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민주금속연맹과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2000년대 들어 성장세는 더 가팔랐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직함을 달았다.
심상정 의원이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금속 관련 업체의 노조 중심에 서기 시작한 1996년 말 심 의원의 친오빠 심상만 코텍(KOTEC) 회장은 현대자동차와의 동고동락에 들어갔다. 1996년 12월 심 회장은 현대자동차 1차 협력사 대표로 현대자동차의 인도 첸나이 공장 기공식에 참석했다. 2주쯤 지난 1997년 1월 8일 심 회장은 아예 인도로 날아가 사업체를 차렸다.
심상만 회장은 한국의 사업을 정리하고 모은 약 10억 원을 가지고 직원 70명을 모았다. 인도에서 처음 수주 받은 일은 현대자동차 공장의 자동화 라인 설치였다. 자동화 라인을 설치한 뒤에도 일은 쏟아져 들어왔다. 자동화 라인 유지보수까지 맡았다. 토목 공사 주문까지 밀려들었다. 토목을 해본 적 없는 심 회장이었지만 수소문해가며 첸나이 내 한국 1호 건설회사를 세웠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자동차를 분해해서 되파는 일까지 하게 됐다. 완성차를 쪼갠 뒤 부분 부분을 나눠 수출하면 자동차 관세가 붙는 게 아니라 자동차부품 관세가 붙게 된다. 자동자 제조업체는 자동차부품 관세가 자동차 관세에 비해 낮은 나라로 자동차를 수출할 때 이러한 녹다운(Knockdown) 방식을 애용한다. 심상만 회장은 녹다운 업체까지 차려 회사의 성장 기반을 다졌다. 20년 뒤 직원은 200명을 넘겼고 매출은 400억 원을 넘어섰다.
심상정 의원의 친오빠가 인도에서 현대자동차 덕에 큰 돈을 벌었다면 심 의원의 이종사촌 오빠 고 심수용 시스콘(Sys-con) 회장은 심상만 회장보다 먼저 미국에서 현대자동차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고 심 회장은 1989년 자신이 운영하던 건설사를 정리하고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정착했다. 휴스턴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그는 2001년 큰 결심을 했다. “몽고메리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였다.
고 심수용 회장은 즉시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로 이사했다. 현대자동차가 몽고메리에 공장 설립 첫 삽을 뜬 2002년 그는 청소와 배수, 공장 외벽 설치 같은 허드렛일을 수주 받았다. 작은 일이었지만 건설업체를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꼼꼼하게 회사를 운영해 갔다. 사업 영역이 확대돼 공장 자체를 설계해주는 일까지 맡기 시작했다.
회사는 그야말로 폭풍 성장했다. 미국 동남부를 진출하는 대기업은 고 심수용 회장을 찾았다.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현대중공업, 한국타이어, 금호타이어,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모두 고객이 됐다. 창립 당시 10명이었던 직원은 현재 400명에 육박하며 매출은 2010년쯤 1000억 원을 넘겼다. 최근에는 연매출 2000억 원을 눈앞에 뒀다고 알려졌다.
이런 심상정 의원의 가족을 두고 묘한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 누구보다 재벌 구조 해체에 열을 올린 국회의원의 가족이 재벌 구조의 수혜를 입었던 까닭이다. 현대자동차에서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고 심수용 회장의 고객사는 모두 범현대가라는 한국 최대 재벌가 소유다.
특히 현대기아차그룹은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협력업체를 내부망에 거래처로 등록해 평가까지 하는 등 그룹 전체가 손쉽고 오래 거래를 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고 알려졌다. 재벌만이 가능한 구조다. 이런 재벌의 구조가 고 심수용 회장이 성공 가도를 달리는 데 큰 힘이 됐다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심 의원의 친오빠 심상만 회장 역시 현대자동차의 인도 첸나이 공장이 몰아준 일감으로 사업에 성공했다.
이를 두고 한 노동계 관계자는 “심상정 의원과 고 심수용 회장의 관계가 알려졌을 때 심 의원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발언을 했다. 허나 친오빠에 대해서는 그런 식의 발언을 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심 의원은 재벌 관련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정치인인데 가족은 정작 재벌 구조 덕에 돈을 벌었다니 쓴웃음이 난다”고 했다. 실제 심 의원은 2013년 이종사촌 오빠의 근황이 보도되자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나고 어릴 때여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사촌 오빠가 맞다”며 “한인회 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내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멀리서나마 성공했다니 가족으로선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와 관련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심상정 의원과 두 분의 사업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 생긴 특혜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두 분의 사업은 심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한참 전부터 시작된 일“이라며 ”특히 친오빠 심상만 회장은 현대와 20여 년 전부터 사업을 같이 했고 큰 규모도 아니다. 사업 분야도 공장 짓는 일 정도라 일을 몰아줬다고 하기엔 힘들다”며 휴가 떠난 심 의원을 대신해 말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그들의 사람 모으는 재주 사람 모으는 재주는 심상정 의원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심상만 회장은 인도 전체를 휘어잡은 인물이다. 재인도첸나이한인회 회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도지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인도도 좁았다. 인도한인회총연합회장인 그는 지난해 말 아시아한인회총연합회와 아시아한상총연합회를 함께 이끄는 수장이 되기도 했다. 고 심수용 회장의 활약상은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몽고메리 한인회장을 거쳐 앨라배마주 전체의 한인회를 한 데 엮는 앨라배마한인회연합회장으로 활약했다. 몽고메리 한인회관 건립 비용을 전액을 부담해 이목을 끌었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