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극중 딸을 서울대 의대에 합격시키기 위해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김서형 분)이 내미는 ‘악마의 손길’을 잡는 열혈 엄마 한서진을 연기했다. 중견 배우, 게다가 누군가의 엄마. 드라마 속에서 조연이나 주변 장치로 끝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SKY 캐슬’이 끝난 후 사람들은 염정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28년 연기 내공이 응축된 캐릭터의 진심이 모두에게 전달된 셈이다. 그는 지난해 개봉된 영화 ‘완벽한 타인’으로도 5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바야흐로 ‘염정아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진제공 = 아티스트 컴퍼니
‘SKY 캐슬’의 촬영 과정에 대해 묻자 염정아는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연기한 한서진이라는 인물도 결코 녹록지 않았고, 연기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배우들과 대거리를 한다는 것도 진이 빠지는 작업이었다. 우선 염정아는 단정한 ‘캐슬룩(look)’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까지 모두 관심의 대상이 됐다. 더불어 연기하며 롤러코스터 타듯 휙휙 변하는 감정을 컨트롤해야 했고 체력도 함께 관리해야 했다.
“워낙 캐릭터가 세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이질감 없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줄지 고민했어요. 모진 말을 많이 했지만 미워 보이면 안 되니까요. 작가님이 써준 한서진은 ‘그레이스 켈리보다 진주가 잘 어울리는 여자’였어요. 스타일리스트와 상의하며 그에 부합하는 모습을 만들려 노력했죠.”
극중 한서진은 모두와 싸웠다. 김주영을 비롯해 남편, 한동네 사는 엄마들, 두 딸과도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연 누구와 대적할 때 가장 힘들었을까? 염정아는 주저 없이 김주영을 꼽았다.
“제일 힘든 건 단연 김주영이었어요. 대화를 나누면 제가 이기는 것 같으면서도 이겨본 적이 없어요. 이 여자 담판을 짓고 싶은데, 결국은 벌 주러 갔다고 벌 받고 나온 느낌인 거죠. 기가 쫙쫙 빠졌어요. 상대적으로 이수임(이태란 분)은 쉬웠어요. 착하니까요(웃음). 이수임은 정직하고 착한 애니까 제가 쏘아붙이면 그게 먹히는 편이었죠.“
염정아와 한서진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한서진처럼 염정아 역시 의사의 아내다. 또한 두 자녀를 키우고 있다. 염정아의 딸과 아들은 올해 각각 초등학교 5학년, 4학년이 된다. 실제 ‘엄마 염정아’의 학습법은 어떨까? 한서진처럼 극성스러울까? 아니면 이수임처럼 자유방임형일까?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극성스럽게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전문기관에 많이 맡기는 편이에요. 아이들의 교과 과정이 어려워서 제가 가르칠 수도 없어요, 하하. 아직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인데, ‘SKY 캐슬’에 출연하면서 앞으로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느끼는 점도 많고 막막했어요. 아이들도 함께 이 드라마를 봤는데 깊은 이야기보다는 자기들이 재미있게 느끼는 부분에만 관심을 보였어요.”
‘SKY 캐슬’에서는 염정아의 일탈도 엿볼 수 있었다. 한서진의 본명은 곽미향. 어린 시절 선지를 팔던 술주정뱅이 아버지 아래서 자란 과거를 숨긴 채 새 이름을 얻고 신분 세탁한 그는 학창시절 동창인 이수임이 자신의 폐부를 깊게 찌르자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라고 발끈한다. 이 명장면 이후 그에게는 ‘아갈미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장면을 촬영할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오죽하면 ‘아갈미향’이라는 별명까지 생각했어요. ‘쓰앵님(선생님)’이라는 유행어를 제가 만들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어요. 저는 발음이 좋은 편이거든요. 근데 제가 ‘선생님’을 빠르게 말하다보면 ‘쓰앵님’처럼 들린다는 얘기를 듣고 신기했죠. 이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가 생기가 많은 패러디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인기가 실감나요.”
사진제공 = 아티스트 컴퍼니
“저는 그동안 맡았던 모든 캐릭터를 좋아하지만 밖에서 보는 눈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SKY 캐슬’을 통해 저를 알게 된 분들도 적지 않을 거예요.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분들도 계시고요. 과거에는 그런 수식어가 연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상관없어요. 오히려 그렇게 기억해주면 고맙죠, 하하.”
염정아는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여배우로서 조바심이 날 만도 한데, 오히려 염정아는 더욱 여유로워졌다. 그런 여유 속에서 좋은 연기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염정아는 더는 나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걸맞은 배역을 맡아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면 누구든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배우가 나이 먹는 것을 받아들이면 편하데, 받아들이지 못하면 많이 힘들어요. 외모 등 눈에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마음이 슬퍼지죠. 그런데 그런 욕심을 내려놓으니 주변에서 오히려 인정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게 여유로워졌어요. 연기할 때도 편하고, 평소 생활과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편해졌죠. 나이 먹으니 그런 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SKY 캐슬’의 결말을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오갔다. 갑자기 모든 인물들이 개과천선하며 급하게 봉합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염정아의 생각은 다르다.
“한서진이 죽을 것이란 확인되지 않은 스포일러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전 만족해요. ‘SKY 캐슬’은 제게 정말 감사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혼자서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고 기도했죠.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해 제가 향후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 좋아요.”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