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과 관련된 각종 염문설은 한국과도 절대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한국영화 ‘사랑하는 사람아’(1981)가 홍콩에 소개되면서 주연배우인 정윤희가 그곳에서도 인기를 끌었는데, 성룡은 정윤희를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성룡은 한국 시장에서 설과 추석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합작영화를 통해 한국 여배우와 종종 연기했는데 ‘성룡의 신화’(2005)에서 함께한 김희선과도 잠시 ‘좋은 관계’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성룡은 한국어를 곧잘 하는 이유도 한국 여성과 사귄 경험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성룡과 임봉교
성룡의 로맨스 라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그가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한 1970년대 말이었다. 1954년생이니 20대 중반부터였던 셈.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대만 출신 가수인 등려군. 우리에겐 영화 ‘첨밀밀’(1997) 주제가로 유명한 그녀는 10대 때였던 1960년대에 데뷔하며 이후 중화권과 일본 등지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막 떠오르던 한 살 연하의 액션 스타 성룡과 1979년에 연인이 되었지만, 1981년에 헤어졌다. 이유는 ‘성격차’로 알려졌고 이후 등려군은 “성룡과는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당시 성룡이 등려군 외에 또 한 명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후 아내가 되는 임봉교였다.
성룡보다 한 살 많은 임봉교는 등려군처럼 대만 출신으로, 1970년대 초에 데뷔해 1979년엔 대만 금마장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던 여배우였다. 그녀는 1981년부터 성룡과 만났는데, 처음엔 난독증이 있는 성룡에게 시나리오를 읽어주며 친해지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성룡은 등려군과 점점 멀어지고 임봉교에게 이끌렸는데, 급기야 1982년에 그녀는 성룡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결국 1982년 12월 1일, 두 사람은 비밀리에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렸고 이틀 후인 12월 3일 임봉교는 아들 방조명을 낳았다. 참고로 성룡의 본명은 ‘방사룡’이다.
이처럼 비밀리에 결혼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 매우 보수적이었던 대만 사회 때문이었다. ‘여배우의 혼전 임신’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기에,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태평양 건너에서 결혼식을 치렀던 것. 이후 임봉교는 성룡의 요구로 배우 생활을 포기하고 가정주부의 삶을 살아가는데, 너무나 바빴던 성룡은 거의 현장에서 살며 1년에 한 번 정도 집에 왔고, 임봉교는 오로지 아들 하나만을 키우며 살아갔다. 주변에선 재능을 썩히는 거 아니냐는 안타까운 말들이 있었지만, 임봉교는 “성실하고 경제력 있는 남편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고 그 꿈을 이루었다”며 내조와 육아에 전념했다.
성룡과 오기리
만약 성룡이 너무 일 때문에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너무 바빴던 아버지’ 정도였다면 비난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성룡 주변엔 항상 여성이 있었고, 그것은 간단히 스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1980년대엔 임청하와의 루머가 있었지만 다행히 루머에 그쳤다. 하지만 1990년대엔 대만 배우인 오기리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고, 급기야 1999년엔 비밀리에 딸 오탁림을 낳는다.
미즈사와 아키
2001년엔 베이징 국제영화제에서 장쯔이와 손깍지를 끼고 등장해 또 한 번 구설수에 올랐던 성룡. 한동안 잠잠했지만 2013년 뒤늦은 폭로 혹은 고백이 있었다. 1980년대 일본 대중문화의 섹스 심벌 중 하나였던 미즈사와 아키가 어느 버라이어티 쇼에 나와, 자신이 과거 성룡과 한때 밀회를 나눈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한 것. 1980년대 초 그녀는 어느 방송사 리포터로 스페인의 ‘쾌찬차’(1984) 촬영 현장에 가게 됐고 성룡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성룡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결국은 헤어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1년 정도 지속됐다. 당시를 회고하며 미즈사와 아키는 “성룡은 친절했고, 특히 몸이 좋았던 남자”라고 말하기도. 헤어진 뒤 긴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2013년 어느 시사회에서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