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영화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 오는 3월 7일 일본에서 개막하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유바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이에 국내 여성단체들은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인 미투 운동에 반하는 결정”이라고 즉각 항의했다. 성폭력 논란에 휘말린 뒤에도 침묵으로 일관한 김 감독을 향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참석 당시의 김기덕 감독. 사진=영화 ‘뫼비우스’ 홍보 스틸 컷
김기덕 감독은 2013년 개봉한 영화 ‘뫼비우스’ 촬영 현장에서 여성배우 A의 뺨을 때리고 사전 혐의 없이 상대역인 남성배우의 신체 부위를 만지게 했다는 혐의로 2017년 피소됐다. 강체추행치상·명예훼손 등 혐의를 받았지만 재판부는 폭행 혐의만 인정해 벌금 500만 원에 약식 기소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과 관련한 성폭력 피해 주장은 이후 연이어 터졌다. 특히 지난해 MBC ‘PD수첩’이 피해자들의 주장을 다루면서 추가 폭로가 쏟아졌다. 과거 감독과 함께 영화 작업을 했던 연기자는 물론 스태프들도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논란은 다시 증폭됐다. 이 과정에서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이 세상에 드러나 공분을 샀다. 이에 김기덕 감독은 ‘PD수첩’ 제작진과 피해를 주장하는 배우들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지만 재판부는 “취재 과정을 살필 때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유로 감독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도 김기덕 감독은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들에 사과를 하지 않고 침묵했다. 국내서 모습을 감춘 탓에 영화계 안팎에서도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 2월.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 초청되면서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은 미투 피해 주장 관련 질문을 받고 “연기 지도였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해 비난 여론을 키웠다.
김기덕 감독을 향한 미투 논란이 여전한 상황에서 유바리영화제가 그의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을 두고 “정서에 반하는 결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개막작 철회 반대 성명을 발표한 여성민우회는 “세계적인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성폭력과 인권침해의 문제에 침묵하고 가해자들을 계속 지원하거나 초청하고 캐스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여성민우회는 또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 담은 메시지가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세계적인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 때도 미투에 어긋나는 내용으로 냉담한 평가를 받았고 국내서도 개봉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유바리영화제는 지난해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배우가 나온 영화를 초청했고, 이번에도 김 감독의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해 마치 (성폭력)가해자의 편에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고도 짚었다.
# 해외서 활동 모색…최근 카자흐스탄서 신작 촬영
여성단체들은 유바리영화제 측에 개막작 취소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국내서 벌어진 상황을 전달하는 한편 인권문제에도 귀기울여달라는 부탁이다. 하지만 이런 반발에도 유바리영화제가 김기덕 감독의 개막작 선정을 취소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 당장 20여 일 앞으로 개막일이 다가온 데다, 독립성을 보장을 기치로 내건 영화제들의 특성상 결정을 유보할 수는 없다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영화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 홍보 스틸 컷
이런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인지 실제로 김기덕 감독은 국내 여론과 무관하게 해외서 다양한 영화 활동을 이어간다. 영화제 참여는 물론 새로운 연출작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 그는 카자흐스탄의 유명 휴양지인 알마티에서 새 영화를 촬영했다. ‘딘’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촬영 소식을 처음 알린 곳은 그의 성폭력 문제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PD수첩’이다. 제작진은 “알미티에서 주최한 영화제에 김기덕 감독이 참석했고 감독의 컨디션은 아주 좋아보였다”는 카자흐스탄의 영화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김기덕 감독이 해외서 활동을 마음껏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폭력 논란을 외면한 그의 행동을 널리 알리려는 추가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바리영화제 개막작 선정과 여성단체의 반발 성명이 나온 직후 소셜미디어서비스를 중심으로 개막작 취소를 촉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됐다.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일본이다 보니 일본어로 이뤄진 해시태그도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대부분 ‘#STOP_영화계_내_인권침해’ ‘#MeToo’ 등의 내용이다.
이에 더해 김기덕 감독의 성폭력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PD수첩’의 해당 방송 내용도 전 세계 방송 전문가들을 상대로 상영된다. 지난해 방송한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이 5월 개막하는 ‘2019 세계공영TV총회’를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촉발돼 지금껏 이어지는 미투 운동을 다룬 내용인 만큼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