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승의 대표 브랜드들. 왼쪽부터 르카프, 케이스위스, 머렐. 사진=화승 홈페이지
매니저들은 그간 본사에서 임금 성격의 판매대금을 6개월짜리 전자어음으로 받고, 부산에 위치한 DH저축은행에서 어음을 할인해 현금으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느닷없이 날아든 화승의 부도 문자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머렐 매장을 운영하는 한 매니저는 “설 직전 날아온 문자 한 통으로 빚쟁이가 됐다“며 ”본사도, 은행도 문을 닫은 연휴 동안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고 토로했다.
임금 성격의 판매대금을 어음으로 받은 쪽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의 매니저는 “면접장에서 본사가 판매대금을 어음으로 지급하겠다고 밝히면서 싫으면 관두라는 식으로 말했다”며 “본사에서 ‘우리는 어음깡을 하는데, 업계 관례’라고 말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어음 발행인인 ㈜화승의 부도로 DH저축은행은 매니저들에게 지난해 8~11월 4개월치 할인어음 상환을 요구했다. 은행은 지난 7일 문자를 통해 “할인어음 금액이 상환되지 않을 경우 카드사의 신용카드 정지, 재산 압류조치 등의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으며, 상환시까지 원금에 11.5% 연체이자가 적용되므로 조속한 시일 내에 변제해 주시길 바란다”고 통보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화승은 매니저들에게 은행과 협의해 부도어음을 개인대출로 전환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먼저 어음할인 잔액 기준 5~10%를 매니저들이 우선 자력변제하면 대출금리를 기존 어음할인과 같은 8.5%로 해 12개월간 분할상환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매니저들은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할 수 있고 DH저축은행 입장에서도 부도어음을 개인대출로 전환하면 대금을 회수할 수 있어 나쁠 게 없다.
(주)화승이 기업회생을 신청한 뒤 DH저축은행에서 화승 매니저들에게 보낸 문자메세지.
DH저축은행은 부산 연제구 연산동 본사 외 다른 영업지점이 없다. 때문에 매니저들이 어음할인 계약 시 ㈜화승 서울 본사나 부산 DH저축은행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 전국에 매장을 둔 ㈜화승이 굳이 전국망이 없고 부산에만 있는 DH저축은행을 지정해 매니저들에게 어음할인을 받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법인등기부를 확인한 결과 ㈜화승과 DH저축은행의 등기상 주소가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화승은 DH저축은행 지분 100%를 보유한 ㈜대호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인등기부상 2013년 5~8월 ㈜화승의 사내이사로 이름이 올라 있는 정 아무개 씨는 ㈜대호의 법인등기부에도 2013년 1월~2016년 3월 사내이사로 이름이 올라 있다. 정 씨는 ㈜대호의 지분 60%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대호의 나머지 40% 지분은 또 다른 정 아무개 씨가 보유하고 있다. 법인등기부만 놓고 보면 ㈜화승의 전 사내이사가 DH저축은행의 실소유주인 것이다.
세 회사는 사람뿐 아니라 기업 연혁에서도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화승과 ㈜대호, DH저축은행의 관계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상호무진주식회사로 출발한 DH저축은행은 1982년 화승그룹에 인수돼 1988년 ㈜화승상호신용금고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후 2002년 ㈜화승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으며, 2004년 ㈜DSP 계열회사 및 특수관계인이 회사의 지분을 인수했다. 현재 ㈜대호는 ㈜DSP와 DH저축은행을 종속회사로 두고 있다.
㈜화승이 발행한 어음이 부도나면서 DH저축은행이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DH저축은행은 ㈜화승의 어음을 할인하면서 수수료를 챙겼고, ㈜화승이 기업회생을 신청하자 부도어음을 매니저들 개인대출로 전환해 회수하기 쉽게 했다. DH저축은행이 그간 챙긴 어음할인 수수료율은 8.5%로 알려졌다. 어음거래에 정통한 한 사채시장 전문가는 “DH저축은행은 ㈜화승 어음할인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을 것”이라며 “최근 다수 저축은행들에서 어음할인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는 간단한 검색만 해도 “화승의 어음을 더 낮은 수수료로 어음할인해주겠다”는 다수 업체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시장전문가는 “어음할인을 하는 업체들은 발행 기업의 재무상황에 따라 어음할인 수수료를 책정한다”며 “비교적 높은 금리를 받아 온 DH저축은행은 ㈜화승의 어음할인을 통해 이익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춰보면 비록 ㈜화승은 부도가 났지만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DH저축은행에는 오히려 이득을 챙겨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낀 매니저들만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DH저축은행과 연관성에 대해 ㈜화승 관계자는 수차례 “해당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말로 일관했다. 또 어음할인을 부산에만 있는 DH저축은행에 지정한 이유에 대해 화승그룹 관계자는 “㈜화승에서 결정한 일이라 그룹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믿고 거래했는데…” 정작 산업은행은 나몰라라 ㈜화승의 기업회생 신청에 따른 납품업체와 매니저들의 피해가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연쇄부도 우려까지 제기되면서 비난의 화살이 산업은행을 향하고 있다. 납품업체들은 “산업은행을 믿고 거래했는데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됐다”며 갑작스러운 ㈜화승의 기업회생신청에 산업은행 책임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화승은 화승그룹 계열사였으나 2015년 산업은행과 KTB PE가 주도하는 사모투자합작회사 ‘KDB KTB HS PEF’에 매각됐다. ‘KDB KTB HS PEF’는 화승그룹이 1200억 원 규모를 출자했으며, 산업은행과 KTB PE가 250억 원을 투자했다. 실질적인 경영은 산업은행에서 맡았다. ㈜화승의 이사진은 산업은행 2인, KTB PE 1인, 화승그룹 1인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감사도 산업은행 직원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화승을 인수한 뒤 기업회생 신청을 할 때까지 경영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과거 산업은행 주도로 구조조정을 겪은 바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화승의 이사진 5인 중 2명을 산업은행이 추천해왔다 하더라도, 규모가 작은 기업이니만큼 산업은행이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산업은행은 경영정상화보다 투자자로서 채권 회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산업은행은 ㈜화승 인수 당시 전환사채 800억 원을 보유해 채권자협의회 대표로 올랐다. ㈜화승 지분을 100% 보유한 대주주인 동시에 채권자협의회 대표가 된 셈이다. ㈜화승의 기업회생 신청은 산업은행의 구조조정 실패로 평가받지만, 산업은행은 ㈜화승 관련 기업과 매니저 등에 대한 추가 자금지원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러 계열사를 통해 KDB KTB HS PEF 지분 63%를 보유한 화승그룹 역시 경영정상화에 대한 지원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화승그룹 관계자는 “선투자했던 지분을 매년 손실처리해왔다”며 “추가 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