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피니티, IMM, 싱가포르투자청, 스탠다드차타드 등으로 구성된 FI들이 내세운 카드는 ‘중재’다. 중재란 당사자 간 합의나 화해로 해결할 수 있는 분쟁을 법원의 재판이 아닌 ‘중재인(仲裁人)’의 판정에 따라 해결하는 절차다.
2014년 4월 1일 오후 ‘횡보 염상섭의 좌상(坐像)’ 제막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최근 신 회장은 재무적투자자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구윤성 기자
중재절차를 진행하고 중재판정을 내리는 주체는 중재판정부다. 보통 여러 명의 중재인으로 구성된다. 중재인단은 당사자 간 합의로 정할 수 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법원 또는 법원이 지정한 곳에서 중재판정부를 구성한다. 중재판정에 대해서는 절차상 하자 등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복하거나 소를 제기할 수 없다. 3심제인 법원 소송보다 신속한 게 장점이다.
FI들은 중재판정을 바탕으로 신 회장의 채무이행을 강제하고, 필요시 신 회장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을 압류할 수 있다. FI는 2012년 포스코대우가 보유하던 교보생명 지분 29.34%를 주당 24만 5000원에 매입하면서 2015년까지 상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신 회장에게 지분을 되파는 풋옵션(put option)을 확보했다. 지난 연말 FI들은 신 회장 측에 주당 40만 9000원에 지분을 사줄 것을 요구했다.
신 회장 측은 당초 상장시 FI들의 지분을 구주매출하는 방식으로 이번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FI들이 수익극대화를 추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신 회장은 소송을 통해 옵션계약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2012년 포스코대우와 FI 간 계약에서 제3자인 신 회장이 상장 또는 콜백옵션 약속을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 계약무효 소송 제기의 명분이다. 당시 신 회장과 우호지분의 의결권이 과반인 상황에서 경영권 위협이 없는데 이익 없이 의무만 존재하는 계약을 맺은 것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민법 104조는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신 회장이 이제 와서 불공정성을 이유로 계약의 원천무효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신 회장과 FI가 옵션계약을 맺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만큼 중재판정에서 채무이행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관건은 액수다. FI가 요구하는 주당 40만 9000원은 투자은행(IB)들이 추정하는 교보생명 가치(약 20만 원) 대비 지나치게 높다. FI는 약속 시한인 2015년 말까지 상장이 이뤄지지 않은 점을 내세우며 신 회장 측에 기회비용에 대한 부담을 지우려 할 것으로 보인다. FI들이 제시한 주당 40만 9000원은 지분 매입 이후 연평균 12%씩 수익을 내야 가능한 액수다. 연 7~8%를 추구하는 업계 관행을 감안해도 훨씬 높다. 하지만 신 회장 지분을 압류해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받고 판다면 가능할 수 있는 수치다.
문제는 과연 이를 웃돈을 주고 살 곳이 있느냐다. 신 회장 지분을 사들인다면 매수자는 교보생명 지분 33.4%를 가진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매수자가 교보생명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리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FI가 보유하던 지분 29%는 채무를 이행한 신 회장에게 귀속된다. 신 회장의 보유지분율이 34%에서 29%로 떨어지지만 우호 주주만 확보할 수 있다면 경영권을 되찾을 수도 있다. 코세르, 수출입은행, 캐나다교원연금 등은 현재 신 회장 측 우호세력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지분만 확보해도 과반이다. FI들이 웃돈까지 치를 원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신 회장 입장에서는 상장을 신속하게 진행해 FI들의 지분이 시장에서 처분될 길을 여는 게 중요하다. 상장만 되면 FI의 손실을 일부 보전해주는 선에서 타협할 길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양측 간 분쟁이 격화하면 상장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거래소는 상장 승인 기준으로 최대주주 등의 지분율, 경영권 분쟁 현황 등을 고려해 기업 경영의 안정성이 현저하게 저해될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열희 언론인
이랜드리테일 상장 확실하지 않은 이유 재무적투자자(FI)와 갈등을 빚는 기업은 또 있다. 이랜드리테일이다. 교보생명과 닮은꼴이다. 이랜드그룹은 2017년 6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이랜드리테일 지분 69%를 큐리어스파트너스, 큐캐피탈 등 컨소시엄에 6000억 원에 매각했다. FI들은 투자금 6000억 원 가운데 2000억 원은 후순위사채를 통해 사실상 미리 떼어갔다. 나머지 4000억 원과 보장수익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실현하기로 했다. ‘4000억+보장수익’이 되는 만큼만 지분을 팔고, 나머지는 이랜드 측이 되가져가는 조건이다. 보장수익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이랜드리테일이 상장작업에 들어섰지만 상장이 확실하지는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금천구 가산동 이랜드그룹 사옥 전경. 최준필 기자 이랜드 측은 올 3월까지 상장을 위한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는 게 의무다. 위반할 경우 FI의 투자수익률에 연 2%를 가산하거나 이랜드 측이 담보로 제공된 이렌드리테일 지분(25.85%)이 동반 매도된다. 문제는 공모가다. 이랜드와 FI는 시가총액 기준 최소 2조 원가량을 바라고 있다. 공모가가 투자회수에 충분한 수준이 아닐 경우 상장되지 않는 편이 FI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연 2%의 보장수익률이 가산되거나 동반매도권 행사로 회사를 통째로 매각할 수 있어서다. 이랜드 측으로서도 충분히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상장을 하는 것보다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나을 수 있다. 이랜드리테일은 NC백화점, 뉴코아 등 유통 브랜드와 멜본, 슈펜 등 패션 자체 브랜드(PB) 등 총 4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 이랜드리테일의 부채를 뺀 순자산 가치는 1조 8000억 원이 넘는다. MBK가 이랜드의 새로운 우군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MBK가 이랜드를 대신해 기존 FI의 투자회수자금을 대고,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공모가가 일정 수준 이상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랜드 측이 상장 강행보다 옵션행사의 선택지를 고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랜드리테일의 상장 주간사는 한국투자증권이다. 최열희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