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민 비서실장. 박은숙 기자
2월 10일 전직 특감반 소속 김태우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김경수 특검’ 관련 폭로를 한 후 청와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 씨의 예전 폭로들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던 것과는 달라진 스탠스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 씨 전략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여권 내에서조차 청와대와 6급 직원 간 공방을 두고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 대처로 풀이된다.
앞서 1월 29일엔 ‘헬조선’ 발언 등으로 도마에 오른 김현철 경제보좌관 사표가 수리됐다. 김 전 보좌관은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가 “문 대통령이 크게 안타까워했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 신임이 남달랐다. 핵심 참모들이 웬만한 구설에 올라도 좀처럼 교체하지 않았던 문 대통령 인사 스타일을 떠올려보면 이례적이고 신속한 조치였다.
앞서의 두 사례에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노영민 비서실장이다. 노 실장은 김태우 폭로, 김현철 사표 등과 같은 주요 현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참모’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의 경제 챙기기 행보에도 노 실장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노 실장에게 “경제계 인사를 두루 만나 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노 실장은 청와대 내부 기강을 잡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직원들의 연이은 구설로 비판이 거셀 때 발탁된 노 실장은 여러 차례 ‘춘풍추상(남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에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을 강조했다. 노 실장은 주간 음주 금지, 불시 가방 단속을 실시하는 한편 직원들의 SNS 자제령까지 내리며 구설수 차단에 나섰다. 노 실장과 가까운 친문 의원 말이다.
“노 실장은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조직 전문가’다. 문 대통령 대선 캠프를 도맡아 꾸렸다. 흐트러진 청와대를 추스르는데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노 실장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는 안정을 찾았다. 김현철 전 보좌관의 빠른 사표(수리)는 누가 봐도 노 실장 작품이다. 노 실장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또 사업가 출신의 노 실장은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북한 문제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문 대통령 대신 노 실장이 경제 부문을 챙길 가능성이 높다.”
노 실장은 명실상부 청와대 2인자로 자리 잡았다. 자연스레 정치권에선 임종석 전 실장과 비교하는 얘기들이 흘러나온다. 임 전 실장 역시 문 대통령의 두터운 신뢰 아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노 실장과는 결이 다르다. 우선 노 실장은 ‘원조 친문’인데 반해 임 전 실장은 ‘신친문’으로 꼽힌다. 친문 진영에선 임 전 실장에 대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며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모습도 임 전 실장 때완 달라질 것이란 게 정가의 관측이다. 임 실장 체제의 청와대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문 대통령이 임 실장을 비롯한 참모들과 휴대용 컵을 들고 산책했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긴 했지만 내부 기강 해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청와대 직원들이 올린 SNS 글로 인한 설화도 끊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임 전 실장 대신 노 실장을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집권 중반기를 맞아 노 실장을 앞세워 청와대 질서와 규율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다.
노 실장이 임 전 실장에 비해 업무 재량권을 더욱 갖게 될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앞서의 친문 의원은 “시간은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임 전 실장이 일을 잘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문 대통령 옆에서 보좌한 노 실장만 하겠느냐”면서 “비서실장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노 실장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일일이 대통령에게 물어보지 않더라도 그 의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 대통령으로선 임 전 실장보단 노 실장이 함께 일하기엔 더욱 편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노 실장은 대통령 대면보고 및 보고서 양 줄이기를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 대통령에게 휴식을 주고, 북한 문제 등 보다 중대한 사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취지다. 이는 노 실장 재량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노 실장이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 믿음이 각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그림이다.
노 실장은 여의도와의 관계에서도 임 전 실장과는 다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임 전 실장은 청와대 입성 후 사실상 정치권과의 핫라인을 열지 않았다. ‘청와대가 여당을 거수기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의 타깃이 임 전 실장을 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임 전 실장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수군댔었다. 당청의 수평적 관계를 부르짖은 이해찬 대표 체제로 접어들면서 임 전 실장 사퇴 요구가 불거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노 실장은 아직 취임 초반이긴 하지만 임 전 실장과는 다른 행보다. 노 실장은 민주당 의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친문 의원은 “노 실장은 당에서 어떤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지 수시로 체크를 한다. 의원들과 직접 만나지는 못 하더라도 자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임 전 실장 때엔 청와대가 좀 멀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의원들이 많다”고 했다. 또 다른 ‘원조 친문’ 강기정 정무수석 역할까지 더해지면서 당청 간 커뮤니케이션은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다는 분석이다.
정치권에선 노 실장 발탁에 숨겨진 문 대통령 노림수에도 주목한다. 이해찬 대표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취임 후 ‘상왕’으로까지 불렸던 이 대표는 거침없는 발언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청와대와 친문 진영에선 불만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를 드러내진 못했다. 친문 관계자는 “대통령이 직접 당 대표와 상대하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대통령도 이 대표를 어려워하는 측면도 있고…”라면서 “임 전 실장이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다 보니 주도권을 당에 뺏기고 말았다”라고 전했다.
친문 진영에선 노 실장이 이 대표의 ‘카운터파트너’를 자처할 것이란 말이 들린다. 이는 당청 관계 복원을 넘어 총선을 앞두고 벌어질 여권 주류(친문과 이해찬 대표 측) 내부의 공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차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핵심 친문 의원은 “노 실장이 친문 진영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무게감과 비중은 상당하다. 그동안 ‘홀대론’에 불만이 많았던 친문계가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노 실장을 통해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라면서 “비서실장 신분임에도 노 실장이 여의도를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것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