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열릴 주주총회를 앞두고 한진그룹과 KCGI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KCGI는 사모투자 합자회사 그레이스홀딩스와 엔케이앤코홀딩스를 통해 지난해 11월 한진칼 지분 10.81%, 한진 지분 8.03%를 인수했다. 두 회사 2대 주주로 부상한 KCGI는 한진칼에 대한 경영참여를 공식화 했다.
KCGI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 건 올해부터다. 지난 1월 20일 한진그룹에 ‘신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을 공개 제안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한진그룹의 현재 지배구조와 경영상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외부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구조위원회와 임원추천위원회, 보상위원회 등을 설치하라고 제안했다. 이어 같은달 31일엔 한진칼과 한진 측에 감사 1명 선임, 사외이사 2명 선임, 석태수 사장 사내이사 제외 등의 내용을 담은 주주제안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한진그룹은 KCGI의 공세가 거세지자 ‘한진그룹 비전 및 한진칼 경영발전방안’을 발표하면서 대응책을 내놨다. 일단 KCGI 측의 제안을 일부 수용했다. KCGI가 ‘기업가치 제고’ 차원에서 제안한 자산 매각안을 받아들여 서울 송현동 땅을 연내 매각하기로 했다. 이곳은 조양호 회장의 숙원사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된 7성급 호텔 부지다.
지배구조 개선 방안에 대해서는 한진칼의 사외이사를 기존 3인에서 4인으로 늘리고, 한진칼과 한진에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회사와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늘리겠다는 얘기다. 동시에 역대 최고 배당금도 내걸었다. 주주가치 강화 차원에서 2018년 당기순이익의 50% 수준의 배당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2015년 41.7%의 주주 배당 이후 가장 큰 배당이다. 배당금 규모도 10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 한진, 중장기 비전 및 경영발전 방안 발표에 ‘타협안’ vs ‘미봉책’ 논란
겉으로 보기엔 한진그룹이 KCGI 공세에 한 발 물러서 ‘나름의 타협안’을 제시한 모양새다. 그러나 KCGI는 “기존 경영진의 연임 및 대주주 이익보호를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강도 높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 한진그룹 사태의 핵심이었던 ‘오너 일가 중심 경영체제’에는 변함이 없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외면한다는 게 KCGI의 입장이다.
실제 한진그룹은 이번 방안에서 KCGI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제안한 지배구조위원회 설치 요구 등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진그룹이 마련한 감사위원회 설치 방안대로라면 일명 ‘3%룰’이 적용된다. 3%룰은 상장사의 감사를 선임할 때 지배주주가 의결권 있는 주식의 최대 3%만 행사할 수 있도록 제한한 규정이다. 이 경우 조 회장은 물론 2대주주인 KCGI와 3대주주 국민연금까지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현재 한진그룹을 상대로 날을 세우는 KCGI와 국민연금의 힘이 빠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최대주주이자 ‘우군’이 많은 조양호 회장과 특수관계인 등이 더 유리해진다. KCGI는 “대주주 이익 보호가 목표인 사내이사와 독립성과 전문성이 없는 사외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라면 이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경영진의 독단과 무능을 견제할 수 없는 거수기 역할만 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진그룹이 호텔사업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송현동 부지는 매각하기로 하면서도 호텔 사업을 중장기 핵심 사업으로 내걸었다. KCGI도 “한진그룹은 오히려 적자사업 부문인 호텔·레저 사업에 대한 투자 확대 등 외형 성장에만 집중하고 있고, 부채비율 축소 및 신용등급 회복 방안 등 내실 경영 전략은 제외돼 있다”고 주장했다. 업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항공사업 특성상 호텔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한진그룹의 경우 향후 오너 일가의 경영 복귀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진이 KCGI 측의 제안이 일부 반영된 중장기 비전 및 경영발전 방안을 공개했지만, KCGI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미봉책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사진은 조양호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 KCGI 공세 차단할 한진의 ‘한 방’
한진그룹과 KCGI의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진그룹은 ‘타협안’을 제시하면서도 KCGI를 겨냥한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앞서의 중장기 비전 및 발전방안이 날을 세우고 있는 KCGI와 국민연금, 소수주주들을 달랠 ‘당근’이라면, 한진그룹이 이번에 내세운 반격의 무기는 KCGI의 공세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으로 평가된다.
한진그룹은 최근 “KCGI는 한진칼과 (주)한진에 주주제안을 할 자격이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앞서의 KCGI의 주주제안을 오는 3월 열릴 주주총회 안건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진이 내세우는 근거는 상장회사에 대한 특례조항인 상법 제542조의6 3항이다. 이 법안엔 ‘6개월 전부터 상장회사의 주식 0.5%(자본금 1000억원 이하일 경우 0.1%)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KCGI가 지분을 6개월 이상 보유하지 않았던 만큼 주주제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게 한진 측의 주장이다. 현재 한진칼 지분 10.8%를 보유한 그레이스홀딩스(KCGI 자회사)의 등기설립일은 지난해 8월 28일이다. 주주제안을 한 지난 1월 31일 기준으로 보유 기간은 5개월이다.
하지만 KCGI의 입장은 다르다. 또 다른 상법 조항 제363조의2가 근거다. ‘지분율 3%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주총일 6주 전에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KCGI는 주식 보유 기간이 6개월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지분율이 3% 이상이면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한진은 주주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KCGI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앞서 주주제안에 담았던 6개 의안을 한진칼이 주주총회에서 상정해야한다는 취지로 의안상정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 변수 많은 법리 다툼, 공은 법원으로
양측 공방의 결과는 법원에서 가려질 전망이지만, 예측은 쉽지 않다. 법조계에 따르면 KCGI가 제시한 제363조의2는 한진칼이 내세운 제542조의6 3항보다 상법에 먼저 올라왔다. 또한 상장사가 아닌 상법상 모든 주식회사에 적용된다. 반면 한진칼이 제시한 542조의6 3항은 상장사에만 적용된다.
판례도 엇갈린다. 2004년 대법원 판례와 2011년 서울고등법원 판례에 따르면, KCGI가 제시한 362조의 2를 542조의6 3항과 함께 적용해 6개월 미만 주주의 주주제안 권한을 인정했다. 반대로 2015년엔 서울지방법원이 미국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을 상대로 제기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주총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특례조항만 우선 적용해 기각했다.
이에 대해 상장사 주주권 관련 소송을 여러 차례 맡았던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양 측의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고, 판례를 봐도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든 이상하지 않다”며 “법원이 ‘6개월 이상 보유’라는 조건을 필수로 판단할지, 선택사항으로 판단할지 여부로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