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현 9단(오른쪽)과 문도원 3단이 꽃보다 바둑센터에서 지난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국을 해설하고 있다.
[일요신문] “다 이긴 바둑을 졌네.” 아마추어 애기가라면 누구나 한 번씩 해 본 말이다. 그냥 쉽게 받아주면 이기는 걸 마음이 급해져 괜히 꼬아서 두면서 결국 지고 마는 패턴이 있다. 프로대국에서도 거액의 상금과 명예가 걸린 승부에선 평소와 다르게 버티다 무너지는 장면을 곧잘 본다.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의심과 불안을 떨치고, 자기 판단을 믿는 뚝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영화 속 명대사 ‘절대 현혹되지 마소~’는 바둑 두는 이들도 명심해야 할 문구다.
작년 연말에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챔피언십 결승 3번기 최종국. 결승에 오른 안국현 9단은 중국 1위 커제 9단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굉장한 대결을 벌였다. 중반 내내 승기를 잡았던 안국현은 한 수 방향 착오로 커제에게 역전당했다. 하지만 커제도 쉽게 이기는 길을 외면하고 패를 만들어 기회를 줬다. 그 한판, 최후의 순간에 안국현은 ‘고’ 대신 ‘스톱’을 외쳐 아쉽게 반집 승리를 놓쳤다.
커제와 대결한 2018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 최종국을 마치고 아쉬워하는 안국현.
안국현 9단은 학자와 같은 풍모에 바둑 스타일도 정밀한 분석형이라 별명이 ‘안 박사’다. 2009년 12월에 입단해 2017년 국내 타이틀(GS칼텍스배)을 거머쥐며 정점에 올랐다. 2018년은 농심배 한국 대표로 뛰고, 세계대회(삼성화재배) 결승에서 활약하는 등 활짝 만개한 시기였는데 결실이 살짝 아쉬웠다. 삼성화재배 준우승 후 인터뷰에선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했으니 후회는 없다. 우승하고 싶었지만, 우승을 못 한다 해도 어차피 계속 노력해야 한다. 군대를 다녀와도 이 무대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만 26세인 안 박사는 2019년 3월 28일 입대한다.
입대를 한 달 앞둔 토요일, 안국현 9단이 꽃보다 바둑센터에서 바둑팬들과 만났다.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꽃보다 바둑센터’는 일반인과 여성을 위한 바둑교습소다. 이 행사를 주최한 문도원 3단은 “짝수 달마다 열리는 정기이벤트로 두 달에 한 번씩 유명 프로기사를 초청해서 ‘나만의 명국’을 자전해설로 들어보는 시간이다. 안국현 선수에겐 어떤 대국을 해설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삼성화재배 결승3국을 선택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스타 커제 선수와 대결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무슨 내용으로 대국을 펼쳤는지 직접 들어보는 자리다”라고 설명했다. 문도원과 안국현은 페어 대회에서 5~6년간 단짝으로 호흡을 맞춘 동료기사다.
승부처 돋보기 ‘안국현 미스터리’ 2018 삼성화재배 결승3번기 제3국 2018.12.05. ●안국현 9단 ○커제 9단 324수 백5.5집승 [장면도] 실전 진행 중반 이후 바둑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혼전이었다. 이겼다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내용이라 서로 쉽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버텼다. 사실은 이런 버팀이 거꾸로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종반 커제가 다시 흔들리면서 흑이 상변에 강력한 패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안국현은 장면도 백2 팻감을 불청하고 흑3으로 따낸다. 이날 해설에서 안국현은 “팻감이 부족해 거의 졌다고 봤다. 그런데 갑자기 A를 안 받고 패를 해소하면서 우상귀를 잡는 수순이 보였다”라고 털어놨다. 당시 해설자들은 “미스터리다. 이길 기회가 왔는데 패를 더 안 한 이유를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었다. 이후 끝내기가 40여 수 더 이어졌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 난 상황이다. [참고도] 마지막 찬스 실전과 달리 흑이 딱 반집을 이기는 수순이 있었다. 안국현은 이 참고도를 놓으며 “똑같이 하변 흑돌을 내주더라도 한번 받아(백 세모, 흑 네모 교환), 상변에서 득을 본 후에 7로 패를 해소하면 흑이 반집 이긴다. 처음부터 이렇게 패를 해소할 생각이 있었다면 충분히 둘 수 있는 수순이었다”라며 아쉬워했다. 당시 안국현은 이기는 길이 잘 안 보여 절망적인 심정이었는데 머릿속에 없었던 새로운 변화가 보이자 계가할 틈 없이 바로 수를 결행한 것이다. |
다음은 팬들과의 일문일답이다.
―커제의 바둑 스타일과 대국 매너는 어떤가? 대국 중에는 커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쳐 심판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기보로만 접했는데 직접 둬보니 역시 강한 기사였다. 빠르게 또 간명하게 두고, 특히 초반 실수가 없는 기사다. 다른 부분도 강하지만, 커제를 상대할 때엔 초반을 잘 대비할 필요가 있다. 기사들은 대국 중에 여러 가지 습관이 있다. 그걸 신경 쓰면 오히려 말리는 거다. 결승 2국을 둘 때는 커제가 종반에 초심자처럼 바둑돌을 엄지로 놓기도 했다. 일부 언론에선 ‘엄지 신공’이라고 썼는데 나는 그냥 ‘이 친구가 유리해서 기분이 좋구나’ 하는 느낌 정도였다. 이런 심리전에 영향을 안 받는 편이다.”
―결승 3국에서 커제와 안 사범 모두 승부처에서 실수가 나왔다. 일류기사들이 왜 이런 장면에서 흔들리는가?
“승부가 무겁게 다가오니까 쉽게 둬서 이길 수 있는 장면에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이 수가 최선일까? 좋은 것 같은데 과연 몇 집 좋은가? 미세한데 더 버텨야 하나?’ 같은 의심이 계속 몰려온다. 평소와 달리 결단을 망설이게 되고, 이겼다는 확신이 안 서니 어려운 길로 가게 된다. 경험이 많이 쌓이면 괜찮아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이런 부분도 실력이다. 일단 지난 삼성화재배에선 내 실력을 모두 펼쳤기에 후회가 없다.”
3월 말 군입대를 하는 안국현이 꽃보다 바둑센터에서 바둑팬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프로기사가 형세판단하는 방식은?
“초반에는 집을 세기보단 돌에 효율을 느끼면서 유불리를 판단한다. 중반과 후반도 계가보단 최선의 수를 찾는데 시간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지어진 집을 세는 건 한 집씩 세어도 금방 알 수 있다. 시간이 없는 속기 대국에선 감으로 판단한다. 3집~5집 정도 차이는 계가를 안 해도 누가 좋은지 느낌이 온다.”
―중국 기사들에게 특히 승률이 높다. 비결이 있다면?
“같은 정상급 강자라도 중국기사와 대국하면 마음이 편하다. 오히려 한국 기사와 만나면 심리적인 압박감이 더 심하다. 실력을 떠나 자기 스타일이 확고한 최철한, 원성진 9단 같은 형들에게 판이 잘 안 짜인다. 둘 다 두텁게 두고 한번에 몰아치는 선이 굵은 바둑이다. 반면 집바둑을 두는 박영훈, 이영구 9단 등에겐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다. 중국기사들도 실수 없이 안정적으로 두려는 경향이 있고, 대체로 잔잔하게 정리하며 이기는 길을 찾는 스타일이 많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