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부지검 형사6부(주진우 부장검사)가 수사 중인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의혹으로 제기됐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분위기다. 검찰은 청와대가 환경부 산하 단체장 채용 등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다는 자체 판단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불공정 인사 개입 의혹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채용비리 혐의까지 얹어서 진행되는 수사. 하지만 수사는 박근혜 정부 때처럼 확대되거나 크게 진행되지는 않을 기세다. 문재인 정부 3년 차, 청와대가 검찰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수사이기 때문. 심지어 청와대 개입 의혹이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등은 여전히 비공개 소환을 하겠다는 게 검찰의 입장이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이종현 기자
처음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환경부. 산하기관인 한국환경공단 등 기관장들의 리스트를 정리했다는 김태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수사관의 폭로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사건이 배당된 곳은 서울동부지검. 검찰은 환경부와 산하기관들에 대한 압수수색 및 소환 조사 과정에서 블랙리스트가 실제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소환하는 등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수사에 속도도 붙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환경부 차원이 아니라,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직권 남용(블랙리스트 작성)을 넘어, 채용비리(부정채용) 의혹까지 수사가 확대됐다. 처음 검찰이 주목했던 것은 전 정권에서 뽑힌 임원을 내보내고, 문재인 정부가 선택한 인사를 임원에 앉히기 위한 ‘리스트 작성 책임자 확인 및 처벌’이었다.
하지만 압수수색 과정에서 일부 면접 문건에서 특정 후보자들에 대한 청와대 추천 표시를 확인했다. 특히 청와대가 선택한 인사를 뽑기 위해 채용 과정이 변경됐을 가능성 등도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이사장과 상임감사에 대한 공모가 2번 이뤄졌던 한국환경공단. 1차 공모 당시, 문재인 캠프 환경특보 출신 유 아무개 씨와 언론사 간부 출신 박 아무개 씨는 각각 이사장과 상임감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2차 공모에서 유 씨는 상임감사로 합격했고, 박 씨는 환경부 산하기관의 자회사 대표로 임명됐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임원 면접 전 환경공단 관계자로부터 면접 관련 정보를 전달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혜 채용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실제 1차 지원 당시 박 씨가 떨어지자 환경부는 상임감사 공모 절차를 없던 일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환경부는 청와대에 ‘전면 재공모하겠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정부 바뀌었다고 바뀌지 않더라” 검찰 판단은?
검찰 관계자는 “(수사 범위나 대상자를) 가늠하고 있지 않다”며 “의혹이 제기된 부분들은 철저히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수사 흐름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의 설명은 사뭇 진지했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전경. 박정훈 기자
그는 “(블랙리스트 작성 및 인사 개입은)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똑같이 이뤄졌던 것 같다”면서도 “청와대가 환경부 산하기관의 임원 자리까지 (특정 인물을 선택해서 의중을 내비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챙겼다는 점에서 놀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리스트는 한 건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박근혜 정부와 달리 인사 리스트는 한 번 작성됐고 업데이트됐거나 그런 정황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의혹이 구체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검찰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 부정채용 의혹 건 외에 다른 환경부 산하기관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과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등 임직원들이 소환됐다. 앞선 법조계 관계자는 “청와대가 한 곳만 그렇게 챙겼겠느냐”며 검찰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건에서 공개된 산하기관로 수사 범위를 확대했음을 시사했다.
# 하지만 수사는 여전히 ‘통제 중’ 비공개 소환 여전
이처럼 수사 성과는 뚜렷하지만, 정권의 통제 하에 이뤄지는 수사라서 얼마나 탄력을 받을지는 의문이다.
비공개 소환도 이뤄진다. 검찰은 김태우 전 수사관의 폭로로 불거진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문건 외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불법사찰 의혹과 여권 주요 인사 비위 첩보 무마 의혹 등에 대해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 등 주요 피고발인들을 비공개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이미 소환 조사를 끝낸 이인걸 전 청와대 특감반장과 환경부 김은경 전 장관, 박천규 차관 등도 소환 일정도 공개하지 않은 바 있다.
봐주기 수사 논란이 일자 검찰은 “조 수석과 임 전 실장 등을 소환하기로 정하거나 일정을 조율한 적이 없다”며 “피고발인 소환은 공보 준칙에 따라 비공개가 원칙임을 말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2월 26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대검찰청을 방문하여 총장면담을 요구하며 기다리고 있다. 자유한국당제공
사안을 검찰에 고발했던 자유한국당은 2월 26일 대검찰청을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소속 의원 20여 명은 26일 오전 문재인 정부의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대검찰청을 항의 방문했다. 문무일 총장을 만나기 위해 5시간 가까이 대검 총장실에서 버티며 항의 농성을 벌였으나 결국 문 총장을 만나지 못했다.
서환한 객원기자
김태우가 폭로한 나머지 의혹들도 수사할까 검찰 내에는 김태우 수사관이 폭로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초조한 분위기다. 수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청와대를 향해 정면으로 수사를 벌이기도 어렵기 때문.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 수사 관련해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검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고 있는 김태우 전 수사관. 최준필 기자 이후 김 전 수사관은 환경부로부터 지난해 1월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표 제출 현황을 담은 문건을 받아서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폭로했고, 이에 청와대가 친정부 인사들을 앉힐 자리를 마련하려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현재 수사에서 사실로 정황이 드러난 것은 블랙리스트뿐이지만, 첫 수사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나머지 의혹들에 대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애매해진 것이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과거와 달리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정권 눈치를 보는 수사를 했다가 검사들이 징계를 받거나 처벌을 받는 상황까지 오지 않았냐”며 “과거처럼 마냥 봐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사권자(청와대)를 향해 강도 높게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기도 힘든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지금 검찰”이라고 진단했다. 또 다른 검사 출신의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지금 수사보다 다음 정권으로 넘어갔을 때 어떻게 다시 다뤄질지에 더 관심을 둬야 하는 사건”이라며 “첫 수사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털고 가느냐에 따라 정권 말 때 재이슈화되는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