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이 씨가 됐을까.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됐다. 당초 하노이 선언이 스몰딜과 빅딜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어떠한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한 노딜로 끝이 났다. 하노이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기대와 반전이 뒤섞인 영화보다 긴박했던 그 현장 속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 초반 너무나 좋았던 회담 분위기
지난 2월 26일 두 정상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66시간을 특별전용열차를 타고 먼저 도착한 김 위원장에 이어 에어포스원을 탄 트럼프 대통령이 뒤따라 베트남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첫날인 27일 양 정상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응우옌 푸 쫑 국가주석, 응우옌 쑤언 푹 총리와 연이어 만나는 등 바쁜 행보를 보인 데 반해 김 위원장은 잠깐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뒤 멜리아 호텔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시작은 좋았다. 27일 오후 6시 28분께(현지시각)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나 단독회담과 친교만찬을 가졌다. 이날 당초 2시간으로 예정된 일정은 20분여를 넘겨 마무리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일 진지하게 대화에 임할 것이고, 협상이 좋은 상황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며 하노이담판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28일 오전 9시(현지시간) 단독 정상회담 분위기도 좋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취재진 앞에서 “우리는 어젯밤 굉장히 좋은 대화를 나눴다. 김 위원장이 언급하셔도 좋고 안 해도 좋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말했다. 27일 친교만찬에서 양 정상이 나눈 ‘좋은 대화’가 무엇인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2차 북미정상회담 첫날 두 정상의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다.연합뉴스.
다만 정상회담에 임하는 양 정상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이미 “서두르지 않겠다. 속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강조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도 환하게 웃으면서도 서두를 것이 없다는 말을 꺼냈다. 반면 김 위원장은 “우리한테 1분이라도 귀중한데…”라고 말하며 단독 정상회담을 재촉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모습을 두고 TBS 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처절할 정도로 급하구나 (라고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북전문가들은 27일 나눈 좋은 대화가 김 위원장의 ‘영변 지구 핵시설 폐기’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핵심 쟁점으로 알려진 사찰·검증까지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트럼프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28일 오전 30여 분간 단독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메트로폴 호텔 중앙정원을 함께 둘러 지나친 뒤 막판 협상을 위해 확대회담장으로 향했다. 소위 말하는 스몰딜 성사는 가시권에 들어온 분위기였다. 북한이 사찰·검증까지 포함한 ‘영변 지구 핵시설 폐기’를 받아들이고 미국이 종전 선언(내지는 평화선언), 연락사무소 설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받아들이는 수준의 협상은 충분히 가능한 분위기가 연출됐던 것으로 보인다.
# 대반전, 확대 정상회담장서 무슨 일이?
불안한 기류. 오전 11시55분, 예정된 업무만찬장소인 ‘라 클럽 바’에 두 정상은 물론 양국 회담관계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확대회담을 마친 양국 관계자들이 만찬을 거쳐 합의문 서명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50분이 지나자 회담장 안팎이 크게 술렁였다. 오후 4시 예정됐던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오후 2시로 당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 오찬과 서명식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현장을 취재하던 각국 기자들이 어리둥절할 사이 두 정상의 전용차량은 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을 빠져나와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2월 28일 문제가 된 북미정상회담 확대회담 장면.연합뉴스.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대북 제재 전면완화를 요구했지만 영변 핵시설만으로 불충분하다. 우라늄을 포함해 새롭게 발견된 부분도 있다. 저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확대 정상회담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 까닭을 양측이 준비한 패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변 지구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종전 선언, 연락사무소 설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생각하고 있던 미국측으로선 대북 제재 전면완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영변 외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다”면서 “미사일도 빠져 있고, 핵탄두 무기 체계가 빠져 있다. (핵)목록 작성과 신고, 이런 것들도 합의하지 못 했다“고 설명했다.
제재 완화에 대해 북측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기자회견을 통해 “민수 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유엔제재 11건 중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채택된 5건)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밝혔고 미국은 ‘대북 제재 전면완화’라고 밝혀 주장이 엇갈린다. 전문가들은 북측이 요구한 5건 해제를 미국 측이 사실상의 전면 완화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플러스알파에 대해 리 외무상은 “미국측은 영변지구 핵시설폐기 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따라서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하노이 기자회견 모습.연합뉴스
# 멀베이니 역할론 눈길
당초 전문가들은 하노이 담판이 결렬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스몰딜이라도 합의문 서명은 무난할 것으로 봤다. 김 위원장이 확신했던 성공적인 회담은 어디서 틀어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3 대 4로 진행된 확대회담 테이블에서 그 원인을 엿볼 수 있다고 분석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미 대북 협상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지만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은 다소 낯선 인물이다.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은 친교만찬과 확대 정상회담에 모두 참여했다.
확대 정상회담에서 ‘대북 강경파’인 볼튼이 일정 부분 악역을 맡았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눈길을 끄는 인물은 멀베이니다. 백악관 예산관리 국장이자 비서실장 대행인 그는 국내 정치 전문가로 연방정부 ‘셧다운’ 등 초강경 보수파로 알려졌다.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은 이번 정상회담이 미국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대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결국 두루뭉술한 합의문이라도 도출될 수 있었지만 실익 없는 합의문 서명은 오히려 미국 언론과 정치권에게 공격당할 여지만 줄 뿐이라는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날 12년간 트럼프 대통령의 해결사 역할을 한 트럼프의 전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의 의회 청문회가 하노이 담판과 함께 생중계로 진행됐다. 미국 현지에선 하노이보다 코언이 톱뉴스라는 말까지 나왔다. 따라서 복잡한 미국 정치 상황 역시 이번 협상 결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
청와대, ‘영변 플러스알파’ 알았나 몰랐나?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로 전 국민이 충격을 받은 가운데 청와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청와대가 북미정상회담 결렬의 이유로 알려진 영변 플러스알파를 사전에 알고도 그동안 쉬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항간에선 핵 보유국을 위한 북한의 노림수가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영변을 중심으로 비핵화 제스처를 취하며 제재를 완화시킨 뒤 플러스알파를 통해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했다는 것.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태 전 공사는 외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이 매우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오래된 시설”이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북미정상회담 직전인 지난 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은 최종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청와대가 북한의 영변 플러스알파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다. 청와대는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을 공식적으로는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영변 플러스알파를 사전에 알았다면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을 원하는 속내를 알고도 도와줬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알지 못했다면 청와대의 대북 정보력 부재로 또 다른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복귀하는 전용기에서 2월 28일 오후 6시 50분(한국시간)부터 25분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북미정상회담 결과 및 한미공조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과 대화해 그 결과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주문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길 희망하고 김 위원장과의 대화에 적극 나설 것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이번 회담 결렬로 상당한 후폭풍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서동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