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인지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그간 북한과 동북아시아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해 11월 구 회장은 사단법인 ‘유라시아21’이 주최한 ‘제2회 유라시아 정책포럼’에 참석해 “30년 전 탈냉전 시기에 첫 삽을 뜬 북방경제협력은 우리와 유라시아 국가들 간 숙원사업 중 하나”라며 “최근에는 남북 화해 분위기 등 세계 정치적 기류가 유라시아 발전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LS산전이 ‘한국스마트그리드엑스포 2018’에 참가해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도 했다. 당시 LS산전은 “대북 전력 인프라 구축은 물론 동북아 전력망 연계 사업의 핵심인 HVDC(초고압직류송전)를 비롯해 지역 단위 분산전원 마이크로그리드 분야 기술력을 강조했다”며 북한과 동북아를 언급했다.
구자열 회장은 지난 2월 말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관심 있게 지켜봤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합의문에 서명을 하지 않아 대북재제 해제는 기약이 없어졌다. 북한의 동북아 슈퍼그리드 사업 참여도 현재로선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2017년 6월,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서울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2회 발명의날 기념식’에서 개회사를 하고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동북아 슈퍼그리드를 추진하는 한국전력공사(한전) 관계자는 “나중에 북한과 협의할 수 있으면 하겠지만 현재로선 북한 없이 사업을 추진 중이며 북한의 참여 유도는 한전 차원에서 할 일은 아니다”라며 “본격적인 사업 착수는 나라별로 사정이 다 달라서 언제 공사에 들어가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어 앞날을 장담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윤영석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전력 수입으로 인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지고 상대국이 이를 무기로 삼는다면 그 타격은 엄청날 것”이라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탈원전 정책과 동북아 전력망 공유사업으로 국가안보까지 위태롭게 하지 말고 원전을 통한 에너지 자립 정책에 보다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슈퍼그리드를 추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북한과의 관계다. 지난해 4월, 송영길 전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은 홍콩 ‘대공보’와의 인터뷰에서 “동북아 슈퍼그리드 및 한국-북한-러시아 간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동북아 에너지시장 통합 및 평화유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LS그룹 관계자는 “동북아 슈퍼그리드에 들어가는 기술은 이미 준비가 돼있고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투입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며 “다만 장기적인 사업이기에 구체적인 이야기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고 전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LS타워 건물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훗날을 기약한 만큼 구자열 회장은 ‘제3차 북미정상회담’을 주의 깊게 지켜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구자열 회장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회장의 임기는 큰 의미가 없지만 LS그룹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LS그룹은 사촌들이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는 사촌경영을 방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LS그룹의 초대 회장은 구자홍 현 LS니꼬동제련 회장이었고, 구자열 회장이 2대 LS그룹 회장이다.
LS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은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이다. 그룹 회장을 역임했던 구자홍 회장은 구태회 명예회장의 아들, 구자열 회장은 구평회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따라서 차기 회장으로는 구두회 명예회장의 아들 구자은 LS엠트론 회장이 거론된다.
구자은 회장은 올해 임원 인사때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또 (주)LS의 디지털혁신추진단장을 겸하면서 그룹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 등을 총괄한다. 재계에서는 차기 LS그룹 회장을 위한 포석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구자홍 회장이 10년 간 그룹 회장을 맡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구자열 회장도 10년 간 그룹 회장을 하지 않을까 예측한다”고 전했다.
구자열 회장이 10년 간 그룹 회장을 맡는다면 임기는 2023년 3월까지다. 구 회장에게 있어 동북아 슈퍼그리드 등 동북아 관련 사업은 실적을 반등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장기 프로젝트이고, 북한의 참여 여부도 불분명해 구자열 회장 대에서 LS그룹이 관련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구자열 회장이 그룹 회장에 취임한 2013년 이후 연결기준 (주)LS의 매출은 매년 하락해 왔다. 이전까지 (주)LS의 매출은 10조 원이 넘었지만 2015년에는 9조 9997억 원을 기록했다. 그나마 2018년 매출(잠정)이 10조 1102억 원을 기록해 구자열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매출액이 상승했다.
오랜만에 매출 10조 원대로 회복했지만 증권가에서는 LS그룹의 향후 전망을 밝게 보지만은 않는다. 김지산 키움증권 연구원은 “올해는 광통신 호조가 지속되는 한편 해저케이블이 도약을 시도해 LS전선의 개선이 두드러질 것”이라면서도 “LS I&D는 북미 통신선 실적 회복이 불확실하고 LS엠트론은 전자부품과 사출기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어 다른 자회사들은 체질 개선 과제를 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구자열 회장이 밝혔듯 LS그룹은 실적 반등을 위해 동북아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법인 ‘LS 인터내셔널 상하이’와 ‘락성전선 유한공사’를 다른 법인과 통합해 경영 효율화에 나섰다. 두 회사의 모회사인 LS전선 관계자는 “LS 인터내셔널 상하이는 초창기 시장 진출을 위한 판매법인이었고, 현재는 다른 중국 법인들이 활성화됐기에 법인세를 절감할 겸 다른 법인과 통합했다”며 “락성전선은 법인 규모가 크지 않아 수익성이 높은 법인에 집중하고자 통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LS그룹은 중국에 10개 이상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실제 (주)LS의 중국 매출은 2017년 1~3분기 4971억 원에서 지난해 1~3분기 8523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주)LS는 분기보고서에서 “적극적인 해외시장 공략, 특히 중국으로의 제2 내수화 전략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의 위치 정립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자열 회장이 북미회담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유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