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마블’ 공식 포스터.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어벤저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관 중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는 ‘캡틴 마블’이 최초다. 영화는 비행 사고로 기억을 잃은 지구인 파일럿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분)가 외계의 전투종족 크리족의 전사로 살아가며 자신의 과거를 찾고, ‘캡틴 마블’로서 각성하는 것을 시놉시스의 큰 줄기로 삼고 있다.
배경인 1995년은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을 알렸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 가운데 가장 과거의 시점을 다루고 있다. 마블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겐 익숙할 국제안보기관 ‘실드’의 초창기 모습과 닉 퓨리(사무엘 L 잭슨 분), 필 콜슨(클락 그레그 분)의 어설픈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닉 퓨리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멀쩡한 두 눈, 7년 전 ‘어벤저스’에서 사망했던 콜슨 요원의 재등장은 첫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캡틴 마블’은 단순히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이어지는 열쇠로서의 ‘캡틴 마블’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어벤저스, 토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각 축(지구, 아스가르드, 우주)에서 발생한 모든 일의 발판이기도 하다. ‘캡틴 마블’의 과거를 따라가며 앞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실마리가 하나씩 연결되는 걸 보는 것도 관람의 또 다른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영화 속 재미와는 별개로 페미니즘은 또 다른 화두다. 앞서 대부분의 남성 히어로들이 히어로로서의 자신과 본연의 자신 사이에서의 고뇌를 보여줬다면, 캡틴 마블은 고뇌에 앞서 억압된 자신을 떨쳐내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고 있다.
“여자는 하면 안 돼”라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1970년의 유년기부터 1990년대 영화 속 현재에 이르기까지. 캡틴 마블, 캐럴 댄버스가 먼저 맞붙어야 했던 것은 외계 세계의 위협이 아닌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억압과 편견이다.
심지어 지구인 신분을 버리고 크리족 전사로서 새로이 태어난 그에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상사이자 멘토(주드 로 분)마저도 “넌 너무 감정적이야”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전사가 될 수 없다”는 말로 캐럴이 지닌 힘을 억누른다.
‘캡틴 마블’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그러나 그만큼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캡틴 마블’의 액션은 통쾌하다. 이제까지의 마블 여성 히어로들이 남성 히어로의 사이드킥에 머물거나 조연 이상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비춰 보면, 그가 내리 꽂는 한 방이 스크린 안팎에서 어떤 위력으로 다가올 지는 굳이 첨언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늘 억압당하며 살아온” 여성의 각성이 이제까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스페이스 솔로 액션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말 그대로 ‘해방’이다. 여성 히어로가 단신으로 우주를 누비며 제 몸의 몇 백 배나 되는 전함을 파괴시키는 장면은 영화 속 최고의 카타르시스 폭발 씬으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여성’ 히어로가 아닌 여성 ‘히어로’로서의 캡틴 마블의 복장과 태도도 눈에 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여성들은 ‘히어로’의 집단에 속해있음에도 영웅적인 모습보단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여성 배우들은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싸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던 바 있다.
히어로 복장이 아니라 단순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불필요한 노출이 등장했던 앞선 작품과 달리, ‘캡틴 마블’에서 볼 수 있는 ‘살색’ 이라곤 캐럴 댄버스의 목 위가 전부다. 캐럴이 속한 크리족 전투 부대 ‘스타포스’ 역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히어로여도 포기할 수 없는 여성의 곡선과 ‘살색’을 중시하던 타 작품과 확연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캡틴마블’의 씬스틸러 고양이 구스.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이야기 속 남성 캐릭터들은 철저히 조력자로만 머문다. 캡틴 마블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닉 퓨리나 크리족 멘토에게조차도 어떠한 핑크빛 기류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와 가장 단단한 결속으로 연결돼 있는 것들은 전부 여성 캐릭터가 차지하고 있다.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왜 총알이 빗발치는 생사의 기로에서 서로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관객들이 있다면 이 영화에선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한편으로는 히어로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여성 주연의 작품’에 다소 불편해 할 집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캐럴의 유년기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기억 부분은 이들의 불편한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할 수도 있다. 성별에서 기인하는 사회적인 억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불편함은 가중된다.
그러나 그런 이들마저도 홀린 듯이 예매창을 클릭하게 만드는 것이, 마블이 보여주는 새로운 마법이다. 6일 오전 7시를 기준으로 ‘캡틴 마블’의 실시간 예매율은 91%를 돌파했다. 이는 마블 히어로 솔로 무비 가운데 최고 흥행작이었던 ‘아이언맨3’의 수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에서 퓨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호출기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어벤저스 시리즈’의 시작을 알고 싶다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극장에 달려갈 이유는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2개의 쿠키 영상과 마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스탠 리의 추모 영상을 놓치지 말 것. 123분, 12세 관람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