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경기 승리 후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마커스 킨(오른쪽). 그의 뒤로 정희재(195cm), 하승진(221cm)과의 신장 차이가 돋보인다. 사진=KBL
[일요신문] ‘171.9cm’
2018-2019 SKT 5GX 프로농구에서는 시즌 말미에 보기드문 기록이 탄생했다. 기록의 주인공은 전주 KCC 이지스 외국선수 마커스 킨이다. 입단 과정에서 그의 신장은 171.9cm로 측정됐다. 1997년 KBL 창설 이래 역대 최단신 선수 기록이 나온 것이다.
전설적인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서 능남고교 소속 변덕규는 신장 202cm, 거구의 빅맨이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운동 능력, 공격 기술 등이 부족해 좌절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유명호 능남 감독은 좌절하고 있는 변뎍규에게 격려의 한 마디를 건넨다. “네 키는 정말 멋진 재능이다.”
이처럼 농구에서 신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능이 될 수 있는 요소다.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키가 큰 선수들을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많은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해도 키가 작다면 활용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마커스 킨의 등장으로 KBL 역대 최단신 기록이 세워졌다. 사진=KBL
KCC는 킨의 영입을 발표하며 “대학 시절 전미 득점왕을 차지했던 선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설명대로 그는 중부미시간대 4학년 시절 NCAA 디비전1 평균득점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KCC 역시 그에게 기대하는 부분은 득점이었다.
그렇다면 뚜껑을 열여본 경기에서 그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지난 1일 서울 SK와의 경기는 킨이 데뷔전을 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3·1절을 맞아 평소보다 많은 6289명의 관중이 잠실학생체육관을 가득채웠기 때문이다.
킨은 1쿼터 약 8분이 지날 무렵 교체로 코트를 밟았다. 첫 움직임은 3점 시도였다. 역대 최단신 선수가 첫 3점을 던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쉽게 슛은 링을 벗어났다.
KCC는 킨을 메인 볼핸들러로 기용했다. 그는 매 공격시 수비코트에서 공격코트로 부지런히 공을 들고 날랐다. 낮은 드리블 높이로 상대 수비수에게 혼란을 가중시켰다.
적극성도 돋보였다. 단신이지만 리바운드에도 적극적이었다. 김민수 등 장신 포워드를 상대로도 매섭게 돌파를 시도했다. 4쿼터 막판 선보인 화려한 개인기는 이날 관중들이 가장 큰 탄성을 지른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플레이 외적으로도 적극성이 드러났다. 팀 동료 송교창이 넘어지자 재빨리 뛰어가 일으키고 슛이 성공하면 환호하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데뷔전은 92-76 승리로 끝났다. 킨 또한 16점 6리바운드 1어시스트로 승리에 기여했다. 한국 무대에 순조롭게 안착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경기에서 그의 KBL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나왔다. 두 번째 경기에선 울산 현대모비스를 상대로 팀이 패했고, 킨의 기록도 반토막(8득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이 났다.
하승진과 나란히 설 때 킨의 신장이 도드라진다. 사진=KBL
경기에 앞서 양팀 선수들이 코트에 나서 몸을 풀고 있었다. KCC는 슈팅 연습을 진행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민-하승진(221cm)-킨의 순서로 슈팅을 쏘게 되면서 이들의 신장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가벼운 점프로 그물을 철썩이는 하승진과 달리 킨은 용수철 처럼 튀어올라 그물을 철썩였다. 남다른 탄력을 자랑하는 킨은 덩크슛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킨은 이날도 1쿼터 후반 교체투입돼 3점슛 성공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다만 2쿼터부터는 팀 관계자가 예견했듯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DB는 수비에 장점이 있는 가드 김현호를 기용, 킨에게 강한 압박을 가했다. 또한 수비하는 킨에게 미스매치 상황이 나오면 DB는 지체 없이 이 부분을 공략했다. 킨은 분투했지만 190cm의 김창모에겐 파울로 막아낼 수 밖에 없었다.
리온 윌리엄스(197cm)와 같은 장신을 상대로도 시도하는 적극적인 골밑 돌파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KBL
그럼에도 킨은 예상보다 일찍 벤치로 물러나야 했다. 3쿼터 초반 저돌적인 돌파로 골밑 돌파를 시도하다 공격자 반칙을 범했고, 파울트러블(4반칙)에 걸린 것이다. 3쿼터 후반 재투입됐지만 부담감에 슛이 적중하지 않았다. 상의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좌절하는 모습으로 3쿼터를 마감했고, 4쿼터엔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KBL 세 번째 경기가 마무리됐다. 최종 기록은 9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였다.
경기 후 감독, 동료들의 평가도 구단 관계자와 궤를 같이 했다. 스테이시 오그먼 KCC 감독은 킨에 대해 “적응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관건”이라면서 “리그 스타일, 파울콜 등에 적응하려먼 시간이 필요하다. 큰 상대들의 몸싸움을 극복하며 득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KCC 가드 이정현은 “킨은 다른 외국선수와 달리 수비부터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고 열정이 있는 선수”라면서도 “아직까지 적응기라고 생각한다. 플레이오프서 능력을 발휘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수가 킨에게 필요한 부분으로 ‘적응’을 꼽았다.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그는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KCC는 정규리그 6경기를 남겨둔 6일 현재 6위와 1경기차로 5위를 달리고 있다. 7위 DB도 2.5경기차로 플레이오프 진출권(6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또한 KCC는 이정현의 말처럼 플레이오프를 대비하고 있다. 단순 진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비록 낮은 순위로 플레이오프에 합류하더라도 더 높은 곳까지 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 이정현, 브랜든 브라운 외에 또 다른 득점 루트인 킨의 존재가 필요하다.
NBA 최단신 득점왕으로 유명한 앨런 아이버슨은 “중요한 것은 서류상 키가 아닌 마음(heart)”이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국내에선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라는 번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KBL에 도전장을 던진 마커스 킨의 작은 신장은 누구나 알고 있는 약점이다. 다만 앞으로 그가 어떤 ‘심장의 크기’를 선보일 수 있을지 농구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