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전경. 최준필 기자
AIG손해보험 노동조합(위원장 김홍헌)이 “금융감독원이 금융사 임직원들의 존엄성과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니 이를 시정해 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2017년 4월이다.
AIG손보 노조가 문제 삼은 것은 금융위원회가 2016년 입법한 ‘명령휴가제도’다. 명령휴가제의 내용은 금융사고 발생 우려가 높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가 일정 기간 휴가를 명령하고, 이 기간 동안 휴가자의 금융거래 내역, 업무용 전산기기, 책상 등 사무실 수색을 실시해 업무수행 적정성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금융사에서 발생하는 직원들의 횡령·사기 사건을 사전에 막겠다는 취지다.
금융위의 입법 제도인 탓에 당시 AIG 사측도 명령휴가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노조의 반발에 부딪치자 ‘금감원의 지시’라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다른 증권사나 은행권에서는 이미 도입을 하거나 도입을 준비 중이었다. 다른 금융사의 노조에서도 반발은 나왔지만, 당시 증권사 직원들의 고객 투자금 횡령 사건이 잇달아 터진 터라 크게 목소리를 낼 형편이 못했다. 결국 AIG 노조는 인권위에 직접 진정서를 낸 것이다.
노조 측은 진정서에서 “금융회사가 명령휴가제를 도입·운영하고 있는지 금융감독원이 수시로 확인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현장검사와 지도를 예고해 제도를 도입하도록 사실상 강요하고 있다”며 “이는 금융사고 등 범죄행위 유무와 상관없이 금융사에 재직하고 특정업무에 종사한다는 사유만으로 임직원을 잠정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명령휴가제도 이행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인권침해 행위가 확대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국가인권위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에 대해 지난 1월 ‘기각’ 결론을 내렸다. 인권위는 “명령휴가제는 금융사의 금융사고 발생 가능성 등 위법·부당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내부통제 강화 차원의 일환이며, 이를 통해 금융사의 건전성 및 소비자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 제도이므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금융사의 사고 발생을 실효성 있게 예방하고, 발생한 사고를 신속히 파악해 조치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적절한 수단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금감원은 금융사가 내부통제방법으로 명령휴가제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에 그칠 뿐 시행에 필요한 적용대상, 실시주기, 적용 예외 대상 등은 금융사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으므로 소속 임직원들의 권리 제한이 최소화되도록 구성할 수 있어 침해의 최소성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보인다”고 전했다. 또 “명령휴가제는 필연적으로 사고 발생 개연성이 높은 특정분야 임직원의 인격권이나 사생활 비밀이 침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제도”라면서도 “제도 도입으로 인해 달성하려는 공익이 이로 인해 제한되는 사익보다 높다고 볼 수 있어 법익의 균형성도 충족된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AIG 노조와 금융업계 입장은 인권위의 조사 과정이나 결과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규칙에 맞지 않게 기한을 1년 6개월 넘게 끌고서야 결과를 내놓으면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금감원의 입장을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우선 진정이 들어오면 90일 안에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인권위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 이해하기 힘든 일로 받아들여진다. 인권위의 ‘인권침해 및 차별행위 조사구제규칙’ 제4조에 따르면 “진정은 이를 접수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도 “다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 기한을 연장할 경우 문서로 진정인에게 그 사유를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인권위는 처리 기간을 넘기고도 먼저 연락을 취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AIG 노조가 문제제기를 하자 “앞서의 진정사건 등으로 인해 미처 지연처리안내문을 송부해드리지 못했다”고 한 차례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AIG 노조 관계자는 “진정인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금감원이나 금융사 사무실 등으로 실사도 나오지 않았다”며 “다른 금융사들의 실태조사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부실조사 논란이 제기되는 이유다.
인권위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인권위 관계자는 “AIG 노조 측은 명령휴가제가 도입되려 하니 제도에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지 판단해달라는 취지였지 구체적 피해사례가 없었다”며 “그러다보니 진정인을 따로 불러 추가 조사할 만한 게 없어 소환조사를 진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한이 길어진 데 대해서는 “비슷한 피해사례 진정이 있으면 같이 다루려고 기다렸지만 타 금융사에서 진정이 접수되지 않았다”며 “인권위 위원들 사이에서도 명령휴가제의 인권침해 소지에 대해 논의 많았지만 AIG 노조 진정과 금감원 측의 답변을 종합해본 결과 제도 자체에 인권침해 소지는 없다고 봤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명령휴가제를 시행한 금융사에서 인권 침해 사례가 접수되면 다시 개별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며 “그때 인권침해 요소가 있으면 명령휴가제가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제도라고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AIG 노조 측은 “인권위가 독립적인 기관으로서 인권에 대해 독자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바로미터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아쉬워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다른 금융사의 명령휴가제 도입 상황은? 명령휴가제는 금융사 직원들의 횡령·사기 사건이 빈번해지자 금융당국이 내놓은 ‘금융투자사 표준내부통제기준’에 따른 제도 보완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입법 이후 2017년 금융감독원에서 금융사들에 명령휴가제 시행을 권고하고 강제했다고 알려져 논란이 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감원에서 각 증권사에 왜 명령휴가를 실시하지 않느냐고 채근해 실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감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금융사 직원들의 횡령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금감원에서는 ‘금융사들이 자체적으로 내부통제 시스템을 실시해 사고를 예방해 달라’고 두 차례 공문을 보낸 것뿐이다. 그러면서 명령휴가가 입법 통과돼 시행됐다고 소개하기만 했다”며 “금감원에서 제도 시행을 강제할 순 없다. 그건 노사 협의 하에 하는 것이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문제를 제기한 AIG손해보험 외 다른 금융사들의 상황은 어떨까. 대부분 시중은행과 증권사들은 명령휴가제를 도입·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거의 활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증권사 노조 관계자는 “처음 도입될 때 본래 제도의 취지와 달리 경영진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저성과자, 문제직원 등을 구조조정할 목적으로 명령휴가제를 남용할지 모른다는 지적이 제기돼 노사가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며 “그러다보니 제도가 실제로 쓰인 적은 없다”고 귀띔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 역시 “명령휴가제가 아니라도 문제직원에 대한 자체감사를 할 때 직무배제 및 대기발령 수준으로도 직원을 격리할 수 있다”며 “명령휴가제가 있지만 실효성이 과연 있을지는 의문이 들어 쓰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민웅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