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표절 문제는 공직자에게 늘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연구 윤리 감수성이 유독 낮은 한국은 학계 출신 정치인이 배출될 때마다 늘 논문 표절로 홍역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논문 표절 시비를 피해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 논문 갈이다. 논문 갈이란 이미 학위를 받은 논문을 새 논문으로 교체하는 걸 뜻한다. 학위 논문은 학위 취득 뒤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일요신문’ 확인 결과 몇몇 학교는 학위를 받은 뒤에도 논문을 교체할 수 있도록 절차를 만들어 놨다고 나타났다.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표절을 하든 도용을 하든 학위 논문의 인준지에 심사위원단의 서명과 날인을 받아 학위를 취득한다. 그런 다음 표절이나 도용이 문제가 될 상황에 놓이면 표절과 도용 부분을 없애고 여유롭게 새 논문을 쓴다. 지도 교수 포섭이 가장 중요하다. 논문 교체 신청서에 지도 교수의 직인이 필수인 까닭이다. 지도 교수의 직인을 받으면 모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에 논문 교체 신청서를 공문 형태로 보낸다. 그런 뒤 각 도서관으로 가서 표절 시비가 걸린 원 논문과 새 논문을 교체하면 끝난다. 증거도 남지 않는다. 학위 논문은 보통 모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에 보관된다.
한체대에서 최근 드러난 논문 갈이 사태 2건은 그 실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한 사립 대학에 재직 중인 A 교수는 ‘지구성 운동이 Goto-Kakizaki 쥐 골격근의 MCT1과 혈중 지질 성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2007년 한체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는 2007년 한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승섭 박사의 논문 ‘지구성 운동과 셀레늄 투여가 당뇨유발 쥐 골격근 형태별 COX IV와 MCT1에 미치는 영향’에 사용됐던 실험 결과가 똑같이 담겼다. (관련 기사: [단독] 한체대 석사생, 표절 논란된 논문 5년 뒤 교체... ‘논문 갈이’의 실체)
한 건이 아니었다. 지난해까지 한체대 학술연구교수였던 B 씨는 2010년 논문 ‘지구성 운동이 NSE/PS-2m 알츠하이머 형질전환 생쥐 뇌의 미토콘드리아 기능 개선에 미치는 영향’로 한체대 출신 석사가 됐다. 이 논문에는 한체대에서 2009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엄현섭 건양대 스포츠의학과 교수의 논문 ‘지구성 운동이 NSE/PS2m 알츠하이머 형질전환 생쥐의 Aß-42로 유도된 세포사멸과 인지기능에 미치는 영향’ 실험 결과와 똑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관련 기사: [단독] 한체대, ‘논문 갈이’ 또 발각... 표절 논란 논문 새 걸로 교체)
이를 두고 한체대에서 조직적 표절 및 논문 갈이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A 교수와 B 씨의 논문 갈이가 모두 한체대의 한 연구실 책임자 C 교수의 지도 아래 발생한 까닭이다. A 교수와 B 씨의 논문 갈이 외에도 C 교수의 지도를 받아 작성된 논문 4편은 현재 표절 시비가 걸려 있다. (관련 기사: 한체대 ‘논문 갈이’ 벌어진 연구실에서 논문 표절 정황 추가 포착)
A 교수와 B 씨는 공문서 위조 의혹에도 휩싸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은 공문을 받아야 논문을 교체해 주는데 한체대에서는 공문을 발송한 적이 없다고 나선 까닭이다. 권봉안 대학원장은 “한체대에서는 이제껏 논문 교체용 공문이 나간 적 없다”고 했다. A 교수와 B 씨는 C 교수가 작성해 준 승인서를 가지고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논문 갈이를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회도서관 관계자는 “공문 없이는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사문서 위조 의혹도 제기됐다. 새 논문에 담긴 인준서의 서명과 직인은 모두 정본이 아닌 까닭이다. A 교수의 논문 심사위원장이었던 권 대학원장과 B 씨의 논문 심사위원장이었던 조인호 교수는 모두 A 교수와 B 씨의 새 논문에 서명과 직인을 날인한 바 없다고 밝혔다. 수사당국은 현재 A 교수와 B 씨의 공문서 위조와 사문서 위조, 행사 등의 혐의점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에 대해 C 교수는 “좋은 게 좋은 거고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차라리 나를 공격하지 제자를 공격했나 모르겠다. 직접 만나서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고 싶다. 한체대로 오라”고 한 뒤 전화를 받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서울대의 보존용 학위 논문 교체 신청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은 공문만 있으면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논문을 교체해 준다고 드러났다. 학위 논문은 보통 책자와 문서가 담긴 CD 형태로 각 도서관에 보관된다. 각 도서관은 요청자가 공문과 함께 새 책자와 새 CD를 가져오면 별다른 비교 절차 없이 원 책자와 원 CD를 모두 돌려준다고 나타났다. 논문 갈이의 증거는 완벽하게 폐기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최소한 원 논문과 새 논문을 모두 보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학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반응했다. 익명을 원한 한 연세대 교수는 “우리 학교는 학위 논문이 일단 제출되면 절대 수정이 불가능하다. 대부분 학교도 마찬가지”라며 “이 일은 학계 신뢰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큰 사건이다.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휘를 받아 오래도록 벌어진 일이었다고 보인다. 단순히 한체대 내부에서 해결토록 놔두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특정 감사 기간에 이 사건 역시 파악했지만 한체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조치했다고 알려진 까닭이다. 교육부는 2월 11일부터 22일까지 한체대 특정 감사를 벌인 뒤 4일을 추가 연장하며 이 문제를 들여다봤다고 전해졌다. 한체대 소속 한 교수는 “한체대 연구윤리위원회는 이런 유사한 문제를 수년간 덮어 오기에만 급급했다. 교육부라도 나서야 하는데 아무런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