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서북부 친 주의 도로 위 청년들.
[일요신문]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입니다. 사시사철 반팔 티셔츠를 입고, 맨발에 ‘쪼리’를 신고 다니다 두터운 점퍼에 구두를 신고 다니려니 어색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거리의 사람들은 ‘도둑들’처럼 검거나 흰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세먼지의 심각함을 알게 합니다. 미얀마도 먼지가 많지만 흙먼지라 그냥 마시고 다닙니다.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여행하는 곳이 전주 한옥마을입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강원도 고향마을엔 한옥들이 다 사라졌지만, 이곳은 잘 보존하여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요.
전주 한옥마을에는 130년의 이야기를 담은 전동성당이 있고, 조선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전이 함께 있습니다. 수백 년된 은행나무들이 그 역사의 숲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여쁜 나무기둥들과 바랜 기와들. 고즈넉한 안뜰에는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나눕니다. 토속음식들을 나누는 대청마루는 반질반질 윤이 납니다. 누구나 하룻밤을 묵고 싶은 집들입니다. 아, 별을 보며 나무를 지피는 집을 그리워한지가 언제였던가, 자문합니다.
부족들의 사냥길. 험난한 산악지대라 야생동물들이 많다.
마을의 잔칫날.
서울에서 미얀마 유학생들을 만납니다. 미얀마 시골에서 한국으로 온 청년들은 고향 음식과 가족들과 고향의 풍광을 그리워합니다. 그중에는 미얀마 친 주에서 온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과 얘기를 나누며 고향 이야기를 합니다. 친 주는 미얀마 서북부에 있고 인도와 국경을 이루는 지역입니다. 제가 양곤에서 25시간 걸려 갔던 기억이 납니다. 버스를 3번 갈아타야만 했습니다. 그 지역의 수도는 하카. 3200미터의 빅토리아 산이 있습니다. 척박한 땅이라 농사도 어렵고, 갖가지 이색적인 풍습이 많습니다.
이곳은 1890년대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알파벳 문자를 만들어 쓰는 부족이 많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웃나라로 떠난 난민이 가장 많은 부족입니다. 그들은 유엔의 난민카드를 받아 호주,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등지에 흩어져 삽니다. 미국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이웃나라에 불법체류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산악지대의 집들.
친 주에는 여러 풍습이 있습니다. 국경마을에서는 아직도 얼굴에 흉칙한 문신을 한 할머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산간오지에 여러 부족이 살고 있어서 높은 산을 넘으면 말도 다릅니다. 국경지대라 마을 간 싸움도 많았고, 남아를 선호해 여아가 귀했다고 합니다. 결혼하면 다른 부족이나 외지의 남자들에게 아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문신으로 얼굴에 뜸을 떴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지우는 일입니다. 이 작업은 얼굴에 바늘을 찔러 상처를 내야 했고, 숯을 갈아 봉합하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친 주를 상징하는 새, 친아우칭예를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친 주 사람들은 Va Phual이라고 부릅니다. 이 새는 짝을 이루면 암컷은 밖을 나가지 않습니다. 수컷이 모든 노동을 다 합니다. 수컷이 죽으면 암컷은 그 둥지에서 끝내 굶어서 따라 죽는다고 합니다. 지금 이 지역은 100년 전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옛 풍습들이 사라졌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나무기둥들과 내부 모습. 오른쪽은 130주년을 맞는 전주 전동성당.
한 청년은 돌아갈 미얀마 고향을 그리워하며 제게 고향마을의 사진을 건넵니다. 저는 고향의 한옥을 그리워하며 전주의 한옥을 찾아왔습니다. 청년이나 저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지 않겠지요. 기이한 풍습마저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곳을 떠나 이 청년은 너무도 먼 길을 왔습니다. 저는 한옥마을 입구의 전동성당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깁니다. 돌아가야 할 먼 미얀마를.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