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이 무너집니다”의 주인공, 송재익 캐스터가 10여년 만에 마이크를 잡았다. 이종현 기자.
[일요신문]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요요기국립경기장). 60년이 넘는 축구 한일전 역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일명 ‘도쿄대첩’이 열린 날이다. 극적인 역전승으로 경기를 뒤집은 이날은 대한민국도 뒤집어졌다. 중계방송 시청률은 50%를 넘어섰고 모두가 한일전을 이야기했다. 당시 감동을 더한 중계진의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멘트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20여 년 전 이 말을 꺼냈던 캐스터가 최근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올 시즌 K리그2 중계를 맡아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는 송재익 캐스터를 ‘일요신문’이 만나봤다.
‘도쿄대첩’으로 불리는 1997년 한일전. 이민성, 유상철, 서정원, 최용수(왼쪽부터). 연합뉴스
2일 중계로 복귀 신고식을 마친 송재익 캐스터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긴장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면서도 “다만 조심스럽기는 하다”고 말했다. ‘팔순을 앞둔 노인이 또 나와서 자리를 차지한다. 저 나이에 또 하는가’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라는 것. 그는 1942년생으로 올해 만 77세가 된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 알렉스 퍼거슨(1941년생)과 단 1살 차이다.
가정에서도 걱정이 앞섰다. 송 캐스터는 “자녀들은 좋아한다”면서도 “아내가 걱정을 많이 했다. 사실은 몇 년 전에도 한 방송사로부터 제안이 왔는데 거절했었다. ‘곱게 물러나게 해다오’라고 했다. 요즘 세상이 험악하지 않나. 악성 댓글 같은 문제들 말이다. 그래서 더 겸손한 자세로 할 생각이다. 톤도 좀 낮추고 말수도 줄이고...”라고 말했다.
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던 일이 일어나게 됐다”며 웃었다. 이어 “과거에 ‘인생 2모작’을 계획 했었다. 직장살이가 끝나면 바닷가에서 다른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제안이 왔다. 내가 축구에 뭘 기여한 게 있다고 이런 기회를 주는지 모르겠다. 다만 축구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고 이제는 내가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하게 됐다”며 웃었다.
송 캐스터는 1970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스포츠 중계를 맡기 시작했다. 처음엔 토크 프로그램 진행에 욕심을 냈던 그였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대본이 없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았다. 아웅산 테러 사건, KAL기 폭파사건 등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토크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내가 인물이 안 좋아서 그런지 시켜주질 않더라(웃음). 아나운서가 원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지 않다. 그런데 의지를 보일 수 있는 게 스포츠 중계였다. 원래는 스포츠 쪽에 큰 관심은 없었다. 녹음기 하나 사들고 효창운동장 다니면서 중계 연습을 했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그걸 선배들에게 들려줬다. 사무실에 녹음한 연습 중계가 울리니 사람들이 ‘아 송재익이가 스포츠 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알았을 거다. 그래서 중계를 하게 됐다.”
그는 “혹시나 내가 자리를 뺏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러워했다. 이종션 기자
송 캐스터는 그간 숱한 경기를 시청자들에게 전했지만 유독 눈물을 흘려가며 중계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그가 중계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대회는 1986 멕시코월드컵이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2006 독일월드컵까지 6개 대회 연속으로 개막전과 결승전 중계에 참여했지만 멕시코월드컵 결승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통일이었다. 당시 서독이 우승을 했고 독일의 동서 통일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결승전 시상식 중계를 하면서 ‘마테우스(당시 서독 주장)가 이끄는 독일 병정들이 저 휘황찬란한 우승컵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나라가 통일이 돼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했다. 그러고 나서 ‘아, 참 부럽습니다’라고 말을 하는데 목이 메이더라. 6·25 전쟁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또 한 번의 눈물을 삼켜내야 했던 순간은 2002 한일월드컵이었다. 대한민국의 세 번째 조별리그 경기였던 포르투갈 전이었다. 그는 “인천월드컵경기장에서 중계를 시작했는데 옆에서 나를 쿡쿡 찌르면서 관전하러 온 이주일 씨를 가리키더라”라며 “그래서 ‘아 이주일 씨도 왔네요’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말이 안 나오더라. 삶에 대한 간절함, 축구 경기에 대한 간절함 등이 느껴지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고 이주일 씨는 월드컵이 폐막한 이후 그해 8월 27일 사망했다.
송 캐스터는 그러면서 멕시코월드컵 중계 당시 비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불가리아와 맞붙었던 곳은 멕시코시티의 지붕이 없는 노천 경기장(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이었다. 중계 준비를 하는데 멀리서 시커먼 먹구름이 보이더라. 걱정이 돼서 당시 대회 스폰서였던 코카콜라 박스를 얻어다가 모니터에 씌웠고 비가 오기 시작하자 우리도 뒤집어 썼다. 다른 나라 중계진들은 모니터가 터지고 스파크가 튀고 난리가 났다. 우리는 다행이 그런 사고는 피했는데 원고가 비에 젖었다. 선수 이름 써놓은 게 다 지워진 것이다. 그런데 그 쪽(불가리아) 이름이 길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라든가(웃음). 그래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이름은 그냥 내가 지어서 불렀다. 시청자들께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
송 캐스터는 선배 방송인으로서 중계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는 “아무리 스포츠 중계라지만 너무 스포츠에 매몰되는 것 같다”면서 “스포츠 이야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틀랜타 올림픽이면 애틀랜타 이야기도 하고,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면 히로시마 이야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꼭 요즘 얘기는 아니다. 전에도 그런 면은 있었다. 과거 활동을 할 때 해외 중계를 나가면 중계진들이 전부 숙소 로비에만 앉아 있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현지에 갔으면 그 곳을 살펴봐야 할 것 아닌가. 장터도 가보고 버스도 타보고 해야 이야기를 하지. 복싱 중계를 한다고 해서 ‘레프트, 라이트’ 소리만 지를 수는 없지 않나”라며 소신을 드러냈다.
그는 특유의 독특한 표현의 비결로 여행을 꼽았다. 이종현 기자
송 캐스터는 이 같은 독특한 표현의 비결로 여행을 꼽았다. 그는 “내가 여행을 참 좋아한다. 대한민국 샅샅이 안 가본 곳이 없다. 어디 가면 쓰레기통 몇 개 있는지 알정도”라며 “SBS에서 K리그 중계 할 때도 주말에 광양 경기가 있으면 캠핑카를 끌고 내려가서 하룻밤 자고 중계한다. 그리고 다음주 울산 중계가 있으니까 천천히 고성, 통영 등을 거쳐서 갔다. 자연을 돌아보고 느끼다보면 그런 표현들이 나오는 것 같다. 죄송스런 이야기지만 책은 많이 못 읽었다(웃음)”고 전했다.
다만 올해부터 다시 마이크를 잡으면서 여행은 잠시 줄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내 중계 철칙은 ‘중계 3시간 전 현장 도착’이다. 숨을 고르려면 그 시간엔 가야 한다”면서도 “일찍 도착해서 관중석에 앉아 잔디 위에 비둘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참 좋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중계 생각을 잊지는 않는다. “앉아 있다가 주변 관중들에게 저 산은 무슨 산인지, 건물은 무슨 건물인지 물어보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중계에 써먹기도 하고...”라며 웃었다.
조심스레 다시 중계석에 선 송 캐스터의 계약기간은 1년이다. 스스로의 행보에 대해 거듭 조심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는 “지망생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나운서 교육을 하기도 했었는데 거길 나가면 정말 간절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래서 이번 중계가 혹시나 내가 자리를 뺏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다. 1주일에 1경기만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각오를 묻자 “욕심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내 목소리가 그립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 원로 가수가 계속 노래를 하듯이 목소리를 들려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약속한 1년 동안 ‘평균’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