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쪽으로 나침반을 설정했다. 헌법 속에 관념적 용어로 있던 자유민주주의를 내가 진정 피부로 느껴본 적이 있었나 돌아보았다.
내 경우 6·25전쟁 말에 태어나 황혼의 나이까지 살아왔다. 세월의 많은 부분이 권위주의와 군사독재로 얼룩져 왔다. 부모나 우리들에게 대통령은 지존인 임금이고 우리는 백성으로 세뇌되어 온 면도 있었다.
고교시절 우리는 학생이자 군인이었다. M-1소총을 들고 청와대 앞을 행군할 때 잔디밭 저쪽에 사는 박근혜는 공주님인 것 같았다. 법과 대학에 입학해 헌법을 만났다.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담당교수는 ‘자유’라는 단어가 빠진 유신헌법을 앞에 놓고 전전긍긍했다. 그 시절은 일정한 틀 속에서 권력이 머리에 심어둔 수신기로 들어오는 메시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평범하고 소심한 나 같은 학생도 형사들이 행적을 감시했다.
그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 보자는 염원이 자유보다 강했기 때문에 자유는 사치라는 생각도 있었다. 굶어죽을 자유 같은 건 필요 없다면서 우리끼리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산업화의 성공으로 우리는 부자나라가 됐다. 민주화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경제발전과정에서 중산층 시민으로 성장한 신세대인 우리의 나라가 됐다.
선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국민여론과 투표가 권력을 견제하는 세상이 됐다. 마음대로 말을 하고 시위를 해도 더 이상 정보기관의 밀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일도 없다.
법률이 권력을 견제하는 법치주의 쪽으로 많이 갔다.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복지사회가 됐다. 독거노인과 노숙자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정부에서 매달 주는 쌀과 돈으로 살 만하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전쟁의 폐허 속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자란 나는 변한 세상에 문득문득 놀란다. 그러나 의식은 아직 지난 시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태극기세력과 촛불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독을 품고 종주먹질을 한다. 촛불세력은 과거 권위주의와 독재의 얼룩을 자유민주주의로 착각하고 그에 편승했던 인간군을 보수로 보는 것 같다.
태극기세력은 밤을 붉게 물들이는 촛불시위에서 죽창을 든 빨갱이의 환상을 떠올리는 것 같다. 메시아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 하루아침에 이 세상이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하고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게 하는 꿈들을 꾸는 것 같다. 좋은 세상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개개인의 영혼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경제지표보다 개개인의 정신지수를 높여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가 존중되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세상이 따뜻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대통령은 지존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중의 한사람인 나라가 공화국이다. 깨어있는 영혼을 가진 국민만이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