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일부 공직자들이 집단 움직임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11일 서울 방배동의 한 커피숍. 남성 3명이 울분을 터트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박근혜 정권 때 공공기관에서 일하다가 현 정부 들어 그만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취재진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앞다퉈 자신의 사례를 전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이들은 왜 만났을까. 그 전에 이들이 어떻게 직장을 떠나게 됐는지부터 살펴보자. 중앙부처 산하기관 임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초 그만뒀다는 인사의 말이다.
“임기가 일 년 정도 남아있던 때라 사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관장이 불러 ‘자리를 교체해야 할 것 같다’며 사직서 제출을 요구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나가라고 하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그런데 얼마 후에 내가 주도했던 사업에 대해 감사가 시작됐다. 적폐로 분류됐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 같이 일했던 부하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다. 솔직히 겁이 났고, 나만 나가면 해결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사표를 냈다. 내 자리엔 정치권 낙하산이 임명됐다.”
또 다른 인사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공공기관 감사로 재직했던 그는 지난해 초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채우면 나가겠다고 했지만 신임 사장으로부터 ‘버텨서 좋을 게 없다’는 말만 들었다”면서 “나와 관련된 개인 비리 자료를 갖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협박이었다. 그만두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료들을 사장이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수사기관 협조 없인 불가능한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나머지 인사도 공공기관 감사로 재직하다 지난해 여름 사표를 냈다. 그의 말이다. “나도 낙하산 케이스라서 정권이 바뀌면 알아서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었다. 적폐청산을 내건 문재인 정부가 임기를 보장해 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사장이 오자마자 비서실에서 사직서 제출을 압박했다. 동시에 과거 업무에 대해 감사가 시작됐다. ‘퇴출 영순위’로 내 이름이 거론됐다. 그런데 나는 회사 나올 때까지 사장 얼굴도 못 봤다.”
셋이 만난 이유는 단지 이런 ‘아픈’ 기억들을 나누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뭔가 대응 방법을 논의를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인식 때문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지난 정권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사를 당하고 내쫓겼다는 부분에 대해 억울하긴 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낙하산이 하루이틀 문제도 아니고, 또 괜히 버텼다간 다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런데 지금 이런 일들이 조직적으로 은밀하게 이뤄진 의혹이 불거지지 않았느냐. 개인의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명도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조용히 사는 게 개인으로선 최선이다. 그런데 청와대가 합법적인 체크리스트라고 한 해명에 분개했다. 박근혜 정권 때 문체부가 산하기관을 동원해 리스트를 만든 게 블랙리스트다. 이번 정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일단 우리가 겪은 일에 대해 법적으로 다툴 수 있는지를 따져보고 있는데, 대부분의 법조인이 블랙리스트 요건을 갖췄다고 조언했다. 비슷한 사례들을 최대한 모으고 있다. 소송 제기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초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 변호사가 현재 이들에게 법적인 자문을 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변호사 사무실 관계자는 “아직 밝히기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정식으로 사건을 맡은 것도 아니다. 5명 정도가 (블랙리스트)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들은 자유한국당과의 공조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이들은 “특정 정당과 손을 잡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이 정권과 싸우기 위해서 제1야당을 찾아가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검찰 수사와 맞물릴 가능성 때문이다. 검찰의 칼날은 청와대를 향해 있다. 사건을 맡고 있는 동부지검에선 청와대 인사수석실 개입 여부에 수사 초점을 맞춘 상태다. 동부지검 관계자는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으면 ‘검찰이 죽는다’라는 인식이 많다. 청와대가 걸려 있긴 하지만 좌고우면(이쪽저쪽 돌아본다)하지 않고 원칙대로 수사한다는 방침”이라고 전했다. 검찰 안팎에선 한찬식 동부지검장(사법연수원 21기)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발의를 주도한 최병렬 전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표의 사위라는 점이 수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앞서의 퇴직자 3명은 환경부와 무관한 기관 소속이었다. 이는 환경부에서 벌어졌던 일이 또 다른 부처에서도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과도 맞닿아 있다. 이들이 법적인 조치를 할 경우 블랙리스트 수사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들 중 한 명은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거쳐 회사를 떠났다. 이는 누군가 기획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서 “실익은 없기 때문에 다들 말리고 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블랙리스트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