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태릉국제빙상장 빙판 위에 ‘초대형 비닐봉투’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보자 제공
[일요신문] 3월 15일 오후 서울 태릉의 한 실내 스포츠 경기장. 다음날 공식대회 일정이 잡혀있는 이 경기장에 방수포가 등장했다. 정확히 말하면, 경기장에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초대형 비닐봉투’가 나타난 것이다. 30년 전 이야기가 아니다. 2019년에 벌어진 일이다.
‘우천순연’, 야구팬들에겐 낯설지 않은 단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되면, 경기를 뒤로 미루는 제도다. 우천순연은 테니스나 골프 등 여러 실외스포츠에서도 간간히 등장하는 변수다. 거센 비는 경기력을 좌우할 큰 변수로 작용한다. 반대로 지붕 덮인 구장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실내 스포츠는 ‘날씨의 안전지대’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한국엔 ‘우천순연’이 존재하는 실내 스포츠가 있다. 바로 스피드스케이팅이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경기 도중 대회 주최 측이 우천순연을 선언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세계 최정상급 실력을 자랑하는 한국 빙속의 어두운 민낯이다.
# 대한민국 유일의 스피드스케이팅 전용구장 = 지붕서 물새는 태릉국제빙상장
태릉국제빙상장의 지붕 누수 현상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사진=일요신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은 총 7개의 메달(금1 은4 동2)을 획득했다. ‘빙속 명가’라 불리는 한국 대표팀은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부터 이어온 메달 행진을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 빙속 인프라를 들여다보면, ‘빙속 명가’란 호칭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먼저 공식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은 태릉국제빙상장 한곳뿐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주무대였던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은 대회를 마친 뒤 끝 모를 휴업에 돌입했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을 운영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여기다 강릉은 태릉에 비해 접근성이 좋지 않다. 한시적으로 경기장을 운영하기엔 여러 제약이 있다. 올림픽이 끝난 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은 허울뿐인 유적으로 남게 된 이유다. 결국, 빙속 대회를 치르려면, 1971년 개장한 태릉국제빙상장을 이용하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개장 49년 차를 맞은 태릉국제빙상장의 노후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샌다. 해가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보수공사가 진행되지만, 누수는 멈추지 않는다. 보수공사가 ‘언 발에 오줌누기’에 가까운 조치처럼 보일 정도다.
이뿐 아니다. 태릉국제빙상장 보수공사 시즌이 찾아올 때면, 선수들은 캐나다나 일본 등으로 국외 전지훈련을 떠난다. 빙상계에선 “7월에서 9월 사이 캐나다 캘거리 빙상장이 한국 선수들로 넘쳐난다. 캘거리가 ‘제2의 태릉’ 소릴 듣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돈다.
한 빙상 지도자는 “7~9월은 겨울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둔 중요한 시점이다. 국외로 전지훈련을 가면, 빙질의 차원이 다르다. 선수들이 느끼는 속도감 역시 다르다.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려면, 국외 전지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지도자는 “태릉국제빙상장이 아무리 보수공사를 거듭해도, 국외 전지훈련처럼 좋은 훈련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국내에 제대로 된 훈련 시설이 없는 까닭에 벌어지는 촌극이다. 문제는 ‘스피드스케이팅 학부모들이 해마다 만만치 않은 국외 전지훈련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지훈련 비용은 선수 한 명당 수백만 원 규모로 알려졌다. 학부모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만한 금액이다.
# 경기력 영향 넘어 선수 부상 위험 높이는 태릉국제빙상장 노후화 문제, 웃어넘길 일일까
2월 21일 ‘제100회 전국 동계체전’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지연됐다. 누수때문이었다. 사진=제보자 제공
2월 19일부터 태릉국제빙상장에선 ‘제100회 전국 동계체전’이 열렸다. 전국 각지의 빙속 선수들이 태릉으로 모여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대회를 하루 앞둔 18일부터 태릉국제빙상장 지붕에서 빗물이 새기 시작한 것.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지붕을 통과해 빙판 위로 뚝뚝 떨어졌다.
빗물이 떨어진 자리엔 웅덩이가 생겼다. 맨눈으로 식별 가능할 정도였다. 이쯤 되면 경기력 저하를 걱정할 차원이 아니었다. 빙판에 물이 고이면,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치기 어렵다. 부상 위험 역시 높아진다.
19일 잠잠하던 누수는 20일 다시 시작됐다. 빙상장엔 물이 흥건히 고였다.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대회 주최측은 ‘우천순연’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이른 오후에 열릴 예정이었던 경기는 오후 5시가 돼서야 재개됐다.
태릉국제빙상장 지붕은 3월에도 어김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3월 15일 오후 서울에 국지성 호우가 내렸고, 태릉국제빙상장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모든 스케이팅 훈련이 전면중단됐다. 이어 태릉국제빙상장 관계자들이 급조한 ‘초대형 비닐봉투’를 얼음판 위에 깔았다. 비닐봉투는 빙판 위에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방수포’ 역할을 했다.
15일은 ‘제54회 빙상인추모 전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회’ 개막 전날이었다. 빙속 선수들과 지도자들은 전국 규모 대회를 앞두고, 대회 정상 개최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걱정은 현실이 됐다. 15일 오후 막을 올릴 예정이었던 ‘제54회 빙상인추모 전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회’는 우천순연됐다. 지붕에서 누수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00회 전국 동계체전’의 데자뷰였다. 대회 시작을 알리는 총성은 해가 질 무렵인 오후 5시가 돼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다.
하지만 빙속 선수들과 지도자들은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빙상 지도자 A 씨는 “선수들은 대회뿐 아니라 훈련 역시 태릉국제빙상장에서 한다”면서 “훈련 스케줄을 잡을 때 반드시 확인할 것이 있다. 바로 다음날 기상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A 씨의 말은 기가 막혔다. “‘웃픈(웃기지만 슬픈)’ 현실이다. 한국에서 ‘다음날 날씨가 어떨지’ 신경 쓰는 실내 스포츠는 스피드스케이팅이 유일할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성과를 자랑하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현주소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