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스포츠 종합경기장 ‘올 댓 마인드’를 만든 정성오 대표.
바둑계 ‘연쇄창업마’ 정성오 대표(36)가 또 일을 저질렀다. 스스로 창업 마귀에 씌었다고 고백하지만, 그가 만든 수담기획(이벤트 기획, 매니지먼트사), 꽃보다 바둑센터(바둑교습소), 신촌 바둑카페도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이번에는 판을 더 키워 바둑을 포함한 마인드 스포츠 전용 경기장을 짓고 있다. 바둑경기장은 한국기원이 몇 년 전부터 구상만 하던 대형 프로젝트다. 실제로 경기도 화성시에 전용 경기장을 건설하고, 한국기원도 이전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도 있었다. 정 대표는 “체육관에서 대회를 열면 매번 바둑판 세팅을 매번 새로 합니다.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도 없습니다. 지난 5년 동안 꽃보다 바둑센터를 운영하며 현장에서 바둑 동호인들에게 들었던 불만과 실제 대회를 기획·대행하면서 느낀 노하우를 경기장 디자인에 모두 녹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국내 최초 바둑전용 경기장
2호선 문래역 3번 출구로 나와 500m 정도 걸으니 ‘올 댓 마인드’라는 간판이 보인다. 실평수만 200평인 2층 건물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인부들이 4월 오픈을 목표로 마감 공사를 하고 있다. 로비를 거쳐 문 하나를 통과하면 꽤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이 경기장은 선수만 200~2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층고가 5m로 높아서 경기장 한 면은 아예 1, 2층을 나누어 관람석을 만들었다. “대부분 아마추어 바둑대회가 체육시설에서 열리는데 대회를 진행하다 보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장소가 문제죠. 바둑경기를 치를 만한 넓은 공간은 대관이 쉽지 않고, 빌리기 쉽고 접근성이 좋은 장소는 당연히 가격이 비쌉니다. 예를 들어 체육관은 대관 1순위가 농구·배구 종목이고 2순위가 공연, 3순위가 기타 동호인체육입니다. 대관 순위에서 밀리는 바둑은 기타 종목들과도 추첨을 해서 번호표를 받습니다. 이런 실정이니 장소를 정하기 전에는 대회 일정을 미리 기획할 수가 없어요.”
정 대표는 새로 만드는 경기장에 사활을 걸었다. 물론 투자자가 있지만, 만약 자금이 부족하면 신장이라도 팔 각오로 뛰고 있다. 수익구조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주말은 바둑대회 대관용으로 쓰고 평일에는 회원 위주 바둑클럽과 어린이 바둑교실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바둑클럽 회원들에겐 전문 강좌를 서비스하고, 자체 리그전과 이벤트 대회를 상시 벌일 계획입니다. 바둑이 주가 되지만, 장기·체스·보드게임 등 마인드스포츠도 함께 하려고 이름을 올 댓 마인드라고 지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찾아오려면 교통 편의성도 중요하다. 경기장이 생기면 어렵게 체육관을 빌리고 업체를 찾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이 정도 규모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시내를 7개월 동안 돌아다녔죠. 부동산중개소만 100군데 이상 들렀고, 40여 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뛰어 이 자리를 구했습니다. 외관은 공장이지만, 내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경기장이 될 겁니다.”
서울 문래동에 오픈하는 마인드스포츠 대회장 ‘올 댓 마인드’ 간판이 보인다. 대회장은 2층이다.
#승부 관뒀지만, 바둑은 떠날 수 없어
정성오 대표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한국기원 연구생에 들어가 어린 시절을 바둑과 함께 보냈다. 83년생으로 나이는 이세돌 9단과 동갑이다. 고등학교 때 연구생 1조까지 올랐지만, 서로 밟아야 일어설 수 있는 냉혹한 승부 세계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프로가 되길 포기했다. “온종일 바둑만 두는데 실력이 안 오르면 이상하죠. 그런데 승부가 체질에 안 맞았어요. 지면 당연히 힘들었고, 이기면 상대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며 더 괴로웠습니다. 격투기 선수가 맞는 사람 아픈 걸 생각하면 때릴 수가 없잖아요. 제 적성은 사실 미술 쪽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만화를 보고 그리는 걸 좋아했나봐요”라고 고백했다. 주먹을 봉한 그는 대학교 1학년 말 돌연 절에 들어가 2년 넘게 행자 생활을 했다. “정말 머리를 깎으려고 고민도 했었는데 평생 고기를 못 먹는다는 생각에 결국 포기했습니다”라면서 웃었다.
다시 속세로 나와선 바로 입대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마당을 쓸던 행자 시절보단 군 생활이 훨씬 편했다고 말한다. 명지대학교에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온갖 사업을 도맡아 했고, 이때 쌓은 실전경험(?)으로 어지간한 규모 인테리어는 모두 혼자 하는 경지가 되었다. 20대 초반을 절과 군대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승부에 대한 마음을 씻을 수 있었다. 제대하고 학교도 졸업한 후에는 유통업 등 바둑과 관련 없는 사업을 시작했다. 대게를 떼어와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이 꽤 쏠쏠했는데 다음 해 엘니뇨가 와서 접었다는 이야기, 쇼핑몰 영업을 하다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망한 이야기 등을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있었다. 그는 2014년에 꽃보다 바둑센터를 창업하면서 다시 바둑계로 돌아왔다.
4월 초 오픈을 목표로 내부 공사 중인 경기장 모습.
#뿌리가 건강해야 꽃이 아름답다
정 대표는 “바둑에 애증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바둑의 매력을 가장 잘 이해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뼈둑인’이다. 강의 실력이나 입담에선 프로를 능가하는 바둑계 일타강사다. 작년엔 대한바둑협회와 손잡고 바둑강사교육 아카데미도 운영했다. 그의 바둑철학은 ‘상생’이다. “바둑에서 흑돌 한 개를 잡으려면 백돌 네 개가 필요합니다. 서로 한 번씩 착수하는 바둑룰을 생각하면 이론상 ‘돌은 잡을 수가 없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상대가 죽여줘서 잡는 거죠. 그러나 기력이 낮을수록 이 부분을 간과하고 처음부터 잡으러만 다닙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10개를 가지려면 9개는 내줘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고받으며 상생하고, 그 차이에서 얻는 작은 이득에 만족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체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장에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두뇌 역시 트레이닝이 필요합니다. 마인드스포츠는 판단력과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특히 바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바둑을 생각합니다. 요즘은 바둑에 대한 포커스가 승부결과에만 맞춰져 있어요. 바둑공부가 정석 외우고 사활 푸는 게 다가 아닙니다. 대국할 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한번 바라보길 권합니다. 위기구품에서 프로 8단을 ‘좌조’라고 하죠. 승부에 취하지 말고 관조하는 자세를 가지면 더 깊은 바둑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래의 목표를 물으니 “놀고 먹는 것”이라고 답하는데 지금까지 정 대표의 행보를 보면 꿈을 이루긴 어려울 것 같다. “바둑동호인들이 편하게 바둑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기반시설을 만드는 게 저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죠. 사실 이런 뜻에 깊이 동감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제가 일을 벌일 수가 있었습니다. 미래에 이런 바둑클럽이 각 지역에서 활성화되어 곳곳에서 DBL(동네 바둑 리그)이 열리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하게 핀 꽃만 봅니다. 꽃이 아름다우려면 뿌리가 건강해야죠. 바둑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호인활동이 왕성해 뿌리가 튼튼해지면 프로기사가 활동하는 엘리트체육도 활짝 피어납니다. 전 둘을 이어주는 줄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