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삔야 소따 스님.
교정에 앉아 그의 기구했던 지난날들에 대해 듣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며 그의 방문도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는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고향과 같은 마궤 주 난마욱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사원에 들어가 스무 살에 출가하여 스승 아바타를 모시며 공부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학승으로 미얀마 불교대학 6곳을 전전하며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대중들의 삶과 사회봉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도시 양곤에서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설에는 여러 후원자, 지식인, 인권단체들이 드나들다보니 당시 군부정권의 미움을 사고,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집회를 가진 죄목으로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1990년과 1998년의 일이었습니다.
양곤대학교 국제학 센터에서.
2007년은 미얀마에 샤프란 혁명이 있던 시기입니다. 유가 폭등을 시작으로 대중들의 삶이 극도로 황폐하고 심각한 때였습니다. 샤프란, 승려의 가사 색깔이 상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때는 승려들이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약연기 속에서 죽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그간 정부 체포조를 피해 몇 개월을 도피생활을 하다 결국 국경을 넘기로 한 것입니다. 스님이 간 곳은 태국 국경 먀와디였고, 다리 건너 매쏫으로 밀입국하였습니다. 2008년의 일입니다. 그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분증도 없는 무국적자 상태로 조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며칠을 걸어 방콕으로 왔습니다.
그의 재판은 그가 없는 상태로 18년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재판입니다. 이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다행히 미국 정부가 난민으로 받아들여 뉴욕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1년. 그 사이 그가 받았던 형법조항은 현 정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영주권을 받았지만 아직은 여행허가증을 발급 받아서 조국으로 와야 했습니다. 타지에서 ‘전 버마 승려연합회’를 만들어 미얀마와 미국 간의 소통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만난 적이 있는 두 사람.
먼 타지에서 그는 자신의 조국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그는 서슴없이 고쳐야 할 헌법조항, 소수부족과의 갈등, 불법무기, 로힝야족 문제, 국경지대 청소년들의 마약 중독 등을 얘기합니다. 헌법은 현 정부에서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고치기 힘들 거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중국의 입김으로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같이 있던 ‘정치범’들은 이제 모두 현 정부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한 한국인도 만나 한국을 잘 압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미소를 짓습니다. 슬펐던 기억은 승려로서 승복을 강제로 세 번이나 벗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갈 때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었습니다. 7년간 있을 때는 해외에 나갔다고 속였는데, 나중에 감옥에 있는 걸 알고 정작 뉴욕으로 갔을 때는 믿지 않던 어머니였습니다. 스님은 이번에 고향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불효를 용서하셨고, 이젠 정말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말합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곧 영구히 돌아올 거라고. 돌아와 이 나라에 부모 없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