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 반대 의견을 갖은 주주들이 의견충돌을 빚고 있다. 임준선 기자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공단은 올해 들어 예년과 달리 대주주의 탈법이나 저배당 기업들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월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며 주주권 행사에 힘을 실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반 주주들에게도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 행동주의펀드 투자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 국민연금이 거수기 역할만 했을 때는 소액주주들도 관심이 없었다”며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면서 이슈를 만들자 소액주주들도 주총에 관심을 보이고 주총장을 많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올해 주총에서는 많은 이슈들이 쏟아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도전을 받았다. 앞서 엘리엇은 지난해 5월 현대차가 추진하던 지배구조개편에 제동을 걸어 임시 주총 취소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번 주총에서 현대차 이사회와 엘리엇은 기말현금배당 및 사외이사 선임 등으로 맞붙었다. 결과적으로 엘리엇의 완패로 끝났다. 특히 현금배당의 경우 현대차 이사회 방안이 86% 찬성률을 거뒀다. 이러한 결과는 글로벌 의결권자문사 ISS와 글래스 루이스를 비롯해 국민연금이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기에 가능했다. 국민연금도 엘리엇의 고배당 요구가 주주행동주의가 아닌 단기차익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국민연금의 반대로 그룹 핵심계열사인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면서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3월 27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빌딩 5층 강당에서 열린 대한항공의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찬성 64.09%, 반대 35.91%로 부결됐다. 대한항공 정관에 따라 안건이 통과되려면 찬성이 66.66% 이상 필요했지만, 2.5% 남짓 부족했다.
이로써 조 회장은 1999년 부친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한항공 경영권을 상실했다. 다만 대한항공 측은 “조양호 회장이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맞지만,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조 회장이 여전히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이고, 그룹 지주사 한진칼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지난 3월 29일 열린 한진칼 주총에서는 2대주주인 행동주의 펀드 KCGI가 반대의사를 표했음에도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이 통과됐다. 한진칼은 대한항공의 최대주주로, 석 대표는 조양호 회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다.
국민연금은 최태원 SK 회장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지만 최 회장은 월등히 앞서는 우호지분을 활용, SK㈜ 사내이사에 재선임됐다. 최 회장 본인 보유 지분 18.44%에 특수관계인 지분을 포함, 최 회장 쪽 지분은 30.32%에 달한다. 반면 국민연금은 지분 8.37%을 갖고 있다. 다만 SK㈜가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하도록 한 정관을 바꾸면서 최 회장은 의장에서 물러났다.
주주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올해 주총을 계기로 기업들은 ‘소통 강화’에 주력했다. 현대차는 엘리엇과 표대결을 앞두고 애널리스트 및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업설명회를 열어 5년간 45조 3000억 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2022년에는 자동차 부문 영업이익률 7%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난해 5월 임시 주총 철회를 두고 시장과 소통이 부족했다는 내부 분석이 나와 정기주총을 앞두고 주주들에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소통의 장을 연 것”이라고 설명회 개최 이유를 전했다.
한편 주총 안건과 별개로 이슈를 모은 총수도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대표적이다. 주총이 예정된 지난 3월 21일 전날, 이 사장에 대한 프로포폴 상습 투약 의혹이 제기됐다. 이 사장 의혹을 접한 소액주주들이 오너리스크를 우려해 주총장에 대거 몰렸다.
주총 의장 자격으로 참석한 이 사장에게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이 사장은 답변하지 않은 채 인사만 하고 주총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장은 주총에서 의장직을 수행하고 20분 만에 자리를 떠났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국민연금 영향력 기업 경영권 좌우할 만큼 절대적일까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사. 사진=연합뉴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조양호 회장 사내이사 연임 부결을 두고 “자본시장의 촛불혁명”,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 역시 “국민연금의 현대자동차와 대한항공에 대한 의사결정이 스튜어드십코드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반면 재계에서는 경영 개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재계 관계자는 “조양호 회장의 사례는 주주가치와 기업가치를 훼손시킬 경우 대기업 총수도 경영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가 됐다”면서도 “다만 기업인들이 투자나 경영판단을 할 때 위축되고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만큼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는 신중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국민연금 기금위원장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는 만큼 정치권의 독립성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주주 이익과 주주 가치를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것은 우려스럽다”며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신중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입장문을 통해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이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재무적 투자자로서 본질적 역할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에 워낙 문제가 많다보니 국민연금뿐 아니라 다른 해외 연기금이나 소액주주들도 행동에 나선 것”이라며 “원안대로 통과된 SK㈜의 경우를 보더라도 국민연금이 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대기업들은 외국인 주주들의 움직임을 더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웅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