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사이드암 투수 정우영은 2019 시즌 초반 가장 돋보이는 신인 중 하나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슈퍼 루키’ 풍년이다. 갓 막을 올린 2019시즌 KBO 리그가 연일 특급 신인들의 등장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개막과 동시에 무실점 행진을 펼쳐 화제를 모은 LG 정우영부터 ‘포스트 양현종’으로 통하는 KIA 김기훈, 강속구를 던지는 언더핸드 롯데 서준원까지 수많은 신인들이 프로에 발을 내딛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프로선수라면 누구나 데뷔전을 평생 잊지 못한다. 잘했든, 못했든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꿈에 그리던 ‘프로 데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한 신인 선수들이 연일 마운드와 그라운드에서 데뷔전 소식을 전해오고 있다. 2017년엔 키움 이정후, 2018년엔 KT 강백호가 각각 신인왕 레이스를 독주했다면, 올해는 쉽게 승자를 점치기 어려운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데뷔 한 달도 안돼 벌써 이름을 알린 2019년 신인들은 어떤 데뷔전을 치렀을까. 그리고 KBO 리그를 호령했던 대선배들은 신인 시절 어떤 데뷔전을 거쳐 프로에서 이름을 날리게 됐을까. 과거와 현재를 수놓은 ‘데뷔 첫 경기’의 기억을 모아봤다.
#‘순수 신인왕’ 부활시킨 이정후와 강백호의 데뷔전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졸 신인이 프로에서 1군 한 자리를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로 여겨졌다. 2008년 최형우부터 2016년 신재영까지, 9년 연속 이른바 ‘중고 신인’이 신인왕을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2017년 키움 이정후가 10년 만에 순수 신인 신인왕에 오르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보고 야구를 시작한 ‘베이징 키즈’들이 본격적으로 프로에 입문하기 시작한 시기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LG 코치의 장남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이정후는 입단 첫 해 시범경기부터 “아버지의 후광으로 과대평가된 게 아니냐”는 편견을 날려 버렸다. 스프링캠프에서 고교 시절 포지션인 유격수를 버리고 외야수로 전향했고, 수비 부담을 덜면서 타격 잠재력이 더 빛을 발했다. 시범경기에서 타 팀 감독들의 찬사를 이끌어 내면서 타율 0.455로 장외 타격왕에 올랐다. 정작 정규시즌 1군 데뷔전은 그리 떠들썩하지 않았다. 그해 3월 31일 LG전에 교체 출전해 조용히 경기를 마무리했다. 대신 4월 4일 롯데전에 처음 선발 출장해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첫 타석에서 데뷔 첫 안타를 때려냈고, 3안타 1볼넷으로 전 타석 출루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한 시즌 내내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23년 만에 KBO 리그 역대 신인 최다 안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2018년엔 KT 강백호가 순수 신인왕 명맥을 이었다. 입단 전부터 강백호의 투타 겸업 가능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신인 최대어’였다. 중학교 시절 전학 이력 탓에 1차 지명 대상자에서 제외됐지만, 2차 지명에서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KT에 지명돼 이름값을 했다. 계약금도 역대 고졸신인 타자 최고 금액인 4억 5000만 원으로 1차 지명 김민(3억원)보다 많았다.
데뷔전에서도 화제성만큼이나 뜨거운 활약을 했다. 3월 24일 KIA와 개막전에 선발 출장해 데뷔 첫 타석에서 직전 시즌 20승을 올린 외국인 투수 헥터 노에시를 상대로 홈런을 날렸다. 역대 최초 고졸 신인 데뷔 첫 타석 홈런이자 역대 최연소 개막전 홈런 기록이었다. 동시에 2018시즌 전체 1호 홈런이기도 했다. ‘역대급’ 신인의 ‘역대급’ 등장에 야구계가 들썩 거렸다. 수비에서 평범한 타구를 처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강백호의 존재감을 알리기에 충분한 데뷔전이었다. 그는 이정후와 마찬가지로 한 시즌 내내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했고, 홈런 29개를 때려내 역대 고졸 신인 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도 다시 썼다. 신인왕 레이스에서도 당연히 적수가 없었다.
#이정후와 강백호의 뒤를 이을 올해 신인들의 데뷔전은?
지난 2년간 신인왕을 가져간 이정후와 강백호는 모두 타자였다. 올해는 신인 투수들이 조금 더 빨리 스타트를 끊었다. LG 2차 2라운드(전체 15순위)에 지명한 정우영은 많은 신인들 가운데서도 초반 레이스에서 가장 앞서고 있는 선수다. 사이드암인 그는 개막 두 번째 경기인 3월 24일 광주 KIA전에서 팀이 9-3으로 앞선 9회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프로 첫 상대 타자인 김주찬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서 호쾌하게 출발했고, 1이닝을 2피안타 2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소속팀 LG의 류중일 감독은 물론이고, 시범경기부터 정우영을 지켜본 상대팀 감독들도 “눈여겨 보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제구가 프로 베테랑 선배들보다 더 안정돼 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신인답지 않은 담력이 호투의 가장 큰 비결로 꼽힌다. 다른 신인들은 첫 등판 호투 이후 다음 경기 접전 상황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종종 보였지만, 정우영은 예외였다. 어느덧 LG 불펜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아가는 모양새다.
롯데사이드암 신인 서준원도 강력한 신고식으로 눈도장을 받았다. 3월 30일 LG전에 구원 투수로 처음 등판해 2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특히 날씨가 쌀쌀한 가운데서도 시속 149㎞ 강속구를 뿌려 화제가 됐다. 경남고 출신인 서준원은 이미 지난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같은 이유로 화제가 됐다. 준결승에서 만난 일본을 상대로 시속 150㎞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지는 모습에 일본 언론조차 “고교 야구 레벨에서 이렇게 빠른 공을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는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다만 다음날인 31일 연장 11회에 이틀 연속 등판했다가 주자 두 명을 내보냈고, 다음 투수가 끝내기 안타를 맞아 패전 투수로 기록됐다. 이틀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셈이다.
해외 유턴파인 SK 오른손 투수 하재훈은 시즌 개막전인 3월 23일 인천 KT전에서 4-4로 맞선 7회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한 뒤 1이닝을 공 15개로 깔끔하게 막았다. 다음 공격에서 SK가 결승점을 올려 데뷔전 승리 투수가 되는 기쁨도 맛봤다. 나이가 29세인 해외 프로야구 경력자라 신인왕 후보 자격은 얻지 못하지만, 올해 SK 불펜 필승조에서 꾸준히 활약할 예정이다. KT 손동현도 3월 24일 인천 SK전에서 2이닝을 안타 없이 무실점으로 틀어 막고 데뷔전을 무사히 마쳤다. 2001년 1월 23일생인 그는 올 시즌 KBO 리그에 등록된 10개 구단 선수 가운데 최연소다. 하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여유 있고 대담한 피칭을 펼쳐 KT의 미래를 밝혔다.
반면 입단 첫 해부터 KIA 5선발로 낙점된 1차지명 왼손 투수 김기훈은 혹독한 데뷔전을 치렀다. 3월 24일 LG전에 구원 등판하면서 프로 선수로는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1⅓이닝 동안 볼넷 4개를 내주면서 제구 난조를 겪었다. 광주 동성고 출신의 강속구 좌완 투수라 입단 전부터 ‘리틀 양현종’으로 불렸던 김기훈이지만, 프로 데뷔전의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지만 선발 투수로 본격 데뷔한 3월 28일 광주 한화전에서는 5이닝 3피안타 6탈삼진 2실점으로 합격점을 받았다. 두 번째 선발 등판인 4월 3일 삼성전에선 처음으로 6이닝(4실점)을 소화하면서 잠재력을 입증했다.
삼성 1차지명 신인 원태인도 프로 데뷔전의 아픈 기억을 다음 등판에서 날린 케이스다. 그는 3월 30일 두산전에서 블론세이브를 범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이후 두 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스스로 기회를 되살렸다. 김기훈과 원태인은 모두 앞서 언급한 서준원과 함께 지난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을 승리로 이끈 주축 멤버다.
#역대급 ‘레전드’의 데뷔전은 어땠을까
한화는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 선발 투수로 19세 고졸신인 류현진(현 LA 다저스)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가 초구를 던진 순간 잠실구장 공기가 달라졌다. 류현진은 LG 1번 타자 안재만과 풀카운트 접전 끝에 7구째 시속 151km짜리 직구를 던져 데뷔 첫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냈다. 이후 삼진 아홉 개를 더 잡아내 역대 데뷔전 최다 탈삼진 기록을 다시 썼다. 최종 결과는 7.1이닝 무실점 승리 투수. 한국 야구의 지형을 뒤흔든 ‘괴물’의 탄생을 알린 경기였다.
류현진의 팀 선배이자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200승 투수인 빙그레 송진우도 그랬다. 대졸 신인 송진우는 1989년 4월 12일 대전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9이닝 동안 4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해태 김용남, 롯데 천창호, OB 장호연(이상 1982년), 롯데 박동수(1985년) 이후 4년 만이자 역대 다섯 번째 데뷔전 완봉승 기록이었다. 송진우 이후로 데뷔 첫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지금까지 27년째 나오지 않았다.
삼성 이승엽은 1995년 4월 15일 잠실 LG전에서 9회 류중일 현 삼성 감독의 대타로 프로 데뷔 첫 타석에 나섰다가 LG의 특급 마무리 투수 김용수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때려냈다. 삼성 양준혁도 1993년 4월 10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6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하면서 출발부터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그래도 여전히 데뷔 첫 경기에서는 고전한 선수가 더 많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 투수였던 해태 선동열은 1985년 7월 2일 대구 삼성전에서 삼성 재일교포 김일융과 선발 맞대결을 펼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7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맞섰다. 그러나 8회에만 5안타 2볼넷을 내주며 5실점 했다. 프로 생활 내내 고작 40번만 패전투수가 됐던 선동열의 첫 1패가 데뷔전에서 나온 것이다.
롯데 최동원도 1983년 4월 3일 구덕 삼미전에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가 2⅓이닝 5피안타(1피홈런) 2실점으로 부진했다. 삼성 김시진 역시 그해 5월 3일 대구 삼미전에서 0-2로 뒤진 8회 1사 후 처음으로 프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볼넷과 2루타, 안타, 희생플라이를 연이어 허용하며 1.2이닝 3안타 3실점(2자책점)으로 돌아섰다.
류현진의 뒤를 이을 ‘괴물 신인’으로 주목 받았던 SK 김광현은 2007년 4월 10일 문학 삼성전에서 프로 무대 첫발을 내디뎠지만, 날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공을 던져야 했다. 김광현은 결국 0-0으로 맞선 4회 양준혁에게 비거리 125m짜리 대형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안산공고 시절 3년 동안 단 하나의 홈런도 맞지 않았기에 더 충격이 컸을 터다. 김광현은 결국 4이닝 8피안타 3실점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잊지 못할 데뷔전의 특별한 기억 1군 데뷔전을 치른 선수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처음 출전 지시를 받은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 것도 안 보였다”는 경험담을 털어 놓는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와 막상 내가 그라운드 한 가운데 서 있을 때의 긴장감은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한·미·일 3국에서 데뷔전을 갖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연합뉴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5년 막 프로에 발을 들여 놓았던 SK 정근우(현 한화)는 그해 현대와의 수원 개막전에 1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유격수 김민재, 2루수 정경배라는 쟁쟁한 키스톤 콤비와 함께였다. 첫 타석부터 안타도 쳤다. 그러나 좋은 결과에 함박웃음을 짓기가 무섭게 1루에서 바로 견제 아웃 당했다. 그는 당시에 대해 “안타 2개를 쳤는데도 너무 긴장해서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며 “도루라면 자신이 있었는데도, 2루가 한참 멀어 보이고 몸이 안 움직였던 기억도 난다”고 회상했다. 1998년 신인왕에 오른 현대 김수경은 그해 4월 17일 쌍방울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6⅓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했다. 눈앞이 캄캄하던 신인 투수에게 힘을 실어준 건 심판의 판정 하나였다. 1회 프로 데뷔 첫 타자를 상대로 풀카운트에서 공을 던졌고, 그 공은 김수경의 눈에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판은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삼진. 김수경은 훗날 “그 덕분에 이후 두 번째 타자, 세 번째 타자까지 삼진으로 잡을 수 있었다”며 “그때 내가 너무 떨어서 잘못 본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 심판이 너무 고마웠다”고 웃었다. 삼성 정인욱은 2010년 5월 4일 롯데전에서 입단 2년 만에 처음 1군 마운드를 밟았다. 0-3으로 뒤진 2회초 2사 만루에서 등판 지시가 떨어졌다. 첫 타자는 당시 롯데 소속으로 타점 1위를 달리고 있던 베테랑 홍성흔. 그런데 홈인 대구구장 전광판에 정인욱이 아닌 다른 이름이 떴다. 전광판 관리자가 처음 보는 정인욱의 이름 대신 당시 삼성 소속이었던 베테랑 불펜 투수 정현욱의 이름을 기재한 것이다. 이 해프닝은 결국 전화위복이 됐다. 피식 웃는 사이 긴장이 풀려버린 정인욱은 홍성흔을 파울 플라이로 잡아냈다.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 최다승(124승)을 올린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2012년 4월 12일 청주구장에서 39세 나이로 ‘세 번째 데뷔전’을 치렀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를 거쳐 고향팀 한화에 입단하면서 역사적인 KBO 리그 데뷔 등판을 하게 된 것이다. 박찬호가 상대한 첫 KBO 리그 타자는 당시 두산 소속이던 이종욱. 1회 1번 타자로 나선 이종욱은 박찬호가 첫 공을 던지기 직전에 타석에서 헬멧을 벗고 인사했고, 박찬호 역시 모자를 벗어 이종욱에게 답례했다. 백전노장 베테랑 투수는 그날 6⅓이닝 2실점으로 관록을 뽐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