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이야기가 아니다. 한 지역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일하고 있는 A 씨의 취업 경험담이다. 그는 “아나운서 준비생 사이에서 이른바 ‘학원 양다리’는 기본이다. 보통 두 군데씩 거쳐 방송인이 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양다리를 걸치는 가장 큰 이유는 ‘추천 채용’ 때문이다. 추천 채용은 아나운서 학원에서 수강생들에게 직접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취업 알선인 셈이다. 대형 승무원 학원에서 외항사의 채용 대행을 맡는 것과도 일부 유사하다. 신촌의 유명 아나운서 학원 관계자는 “큰 방송국은 공개 채용을 실시한다. 이것을 제외한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스포츠 리포터, 장내 아나운서 등의 채용은 상당부분 추천제를 통해 학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채용박람회에 참가한 방송사 취업 지망생들. 사진은 기사 내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우리 학원에서만 뽑아” 학원생 유혹하는 ’단독추천‘
서울 신촌과 강남에 위치한 유명 아나운서 학원을 찾았다. 복수의 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본 결과 대부분의 학원이 비슷한 강의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있었다. 정규반은 37~40회차이고 수업 시간은 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씩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주말에 한 번 여섯 시간을 듣는 것도 가능했다.
각 학원의 상담사들이 내세운 것은 ’추천 채용‘, ’단독 채용‘이었다. 이들은 공개 채용보다 추천 채용의 합격률이 더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학원의 상담사는 추천 채용을 설명하는 데 전체 상담 시간 40분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기도 했다.
추천 채용이 이뤄지는 과정은 이렇다. 인력이 필요한 기업이 일부 대형 아나운서 학원에게 추천 채용을 의뢰한다. 의뢰를 받은 학원에서는 본원 수강생을 중심으로 서류 면접을 진행한다. 최종 면접 전까지는 모두 학원 내부에서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번거로운 채용 과정을 줄일 수 있고 학원 입장에서는 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해 더 많은 원생을 모집할 수 있다.
이런 탓에 학원에서는 추천 전쟁이 벌어진다. 얼마나 많은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지가 학원의 능력을 가르는 중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신촌에 위치한 한 학원 관계자는 “우리 학원은 ‘단독 추천’이 타 학원보다 많다. 우리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에게만 지원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경쟁률이 낮아진다”는 말로 기자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학원 내 추천 채용 합격생과 공채 합격생의 수를 비교해 만든 그래프를 홍보자료로 쓰는 학원도 다수다.
아예 자체적으로 내부 오디션을 진행하는 학원도 있었다. 해당 학원의 상담사는 “우리 회사는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기업에 인사를 추천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에 학원 오디션이 열리는데 여기서 눈에 띄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추천은 담당 강사가 한다”고 말했다.
#’응시 기회’ 가격은 400만 원
문제는 채용과정에서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학원에서 진행하는 추천 채용의 혜택이 오로지 수강생들에게만 돌아가는 까닭이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사람은 응시는커녕 채용 정보조차 얻기 힘든 구조다. 설사 학원을 다닌다 하더라도 자신이 다니는 학원의 추천권이 없다면 지원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나운서 준비생 사이에서는 여러 학원을 걸쳐 다니는 이른바 ‘양다리’, ‘삼다리’ 현상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또 다른 현직 리포터 B 씨는 “담당 강사만 잘 만나면 아나운서 준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친구도 바로 채용이 되곤 했다. 이쪽 업계 채용은 워낙 알음알음 이뤄지기 때문에 강사 추천으로 서류 통과만 해도 엄청난 기회를 받은 것“이라며 ”당시 학원을 다닌 친구 대부분이 추천권을 가진 담당 강사에게 잘 보이려 애쓰곤 했다”고 말했다.
B 씨는 “학원마다 들어오는 추천 의뢰도 조금씩 다르다. 어떤 학원은 지역 방송국 채용 추천이 자주 들어오는가 하면 어떤 학원은 스포츠 관련 추천 의뢰가 많다. 최대한 많은 기회를 얻고 싶은 준비생 입장에서는 여러 학원을 다닐 수밖에 없는 셈이다. 나 역시 정규반, 심화반, 일대일 개인 과외를 각각 다른 학원에서 수강했다”고 말했다.
들어가는 돈은 몇 곱절이다. 신촌과 강남 등에 위치한 아나운서 학원비는 대개 400만 원선. 이는 37~40회 수업 비용이다. 여기에 일대일 개인 지도를 더하면 시간당 15만 원 이상을 더 내야 한다. 기본반을 수료하고나면 고급반, 단과반 등의 과정을 수강해야 합격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되면 학원비로만 거의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 필요하다. 취재 결과 이름난 대형 학원 3곳의 학원비도 대체로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세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2년 가까이 아나운서를 준비했다는 한 학생은 “혼자서 공부하다가 지난해부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큰 방송사보다는 작은 방송사에서 경력을 쌓고 싶은데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서는 중앙 방송국 공채를 제외한 다른 방송사에는 원서 넣기조차 쉽지 않았다. 수강료 400만 원을 내고 응시 자격을 산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