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사진=M&M인터내셔널 제공
소련의 절대자 스탈린의 사후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돼 버린 정치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까다로운 미식가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역사의 겉에 유머를 바느질한 이 영화는 폭소 속에서 솜처럼 터져 나오는 서늘한 사실을 재발견하도록 관객들을 이끈다.
제목 그대로 1953년 소련의 주석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 직후가 배경이다. 후계 구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스탈린과 그의 권력을 놓고 니키타 흐루쇼프(스티브 부세미 분)와 라브렌티 베리야(사이먼 러셀 빌 분) 간에 발생했던 정쟁을 107분 동안 담아냈다.
영국식 익살극의 형태를 빌린 ‘스탈린이 죽었다!’는 ‘날 선 유머’로 관객들을 겨냥한다. 피가 튀기고 총알이 난무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긴장감이 고조되는 씬 속에서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는 비현실적일 만큼 익살스럽다.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 영화의 주요 줄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들이 이를 진지하게 탐구하거나 실제 역사와의 차이점을 비판적으로 논해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할 정도로 영화는 결코 무겁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이질적인 부분이 관객들로 하여금 온전한 제3자로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영화적 각색과 기반된 사실 사이에서 균형잡힌 줄타기를 하며 관람하게 된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흐루쇼프 역의 스티브 부세미가 펼친 열연이다. 정적인 베리야와의 피 튀기는 권력 쟁탈전을 벌이는 그 긴 호흡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블랙 유머와 적절한 긴장감 사이를 오가는 그의 완급 조절 덕일 것이다.
말 한 마디로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살얼음판에서 이 정계 거물들은 초등학생만도 못한 말다툼과 모욕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극 후반부 흐루쇼프의 주도로 휘몰아치는 피바람은 예상보다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형제자매 간의 유치한 싸움처럼 유머스럽게 각색된 영화의 배경이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 다소 늘어져 있던 관객들의 시선을 조이는 데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이점은 배우들의 대사가 ‘타국’을 무대로 하면서도 ‘영어’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이런 ‘자국중심주의’적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그다지 거슬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촬영의 용이성이 아니라 각별한 장치로써 주문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주목할 만한 점이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소련의 역사를 쥐락펴락한 거물 정치인들이 상스러운 영어 욕설을 쓰며 말다툼을 벌이고, 서방의 문물을 비유로 언급하는 것은 ‘스탈린이 죽었다!’가 보여주는 또 다른 부조리다. 당시의 소련에서 가장 불경스럽게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면 영화를 본 뒤 한 번쯤 다시 곱씹어 볼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관람을 위해 20세기 중반 소련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웃을 수 있을 때 웃고, 진지할 수 있을 때 진지하면 그만이다. “끔찍한 역사의 주축이 됐던 인물들을 너무 가볍게 다뤘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멀리서 보자. 4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