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황금세대라 불리던 전설의 ‘92학번 트로이카’. 사진 왼쪽부터 임선동-조성민-박찬호. 연합뉴스
[일요신문] ‘일요신문’ 재창간(타블로이드판) 호가 본격 발간된 1992년. 한국 야구계는 황금세대의 등장으로 들썩였다. ‘92학번 트로이카’ 이야기다.
‘92학번 트로이카’의 주축은 투수 세 명이었다. 바로 연세대 임선동, 고려대 조성민, 한양대 박찬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세 투수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며 각자의 야구인생을 걸었다.
트로이카 중 최대어로 꼽혔던 임선동은 프로 입단 과정에서 ‘3중 계약 논란’에 휘말렸다. 1995년 일본프로야구(NPB) 다이에 호크스가 임선동을 원했고, 실업팀 현대 피닉스가 임선동 영입에 성공했다. 한편 KBO리그 LG 트윈스는 ‘1992 KBO 신인지명회의’에서 임선동을 지명하며 선수 보유권을 주장했다.
결국 임선동은 1997년 LG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임선동의 프로생활은 ‘원 히트 원더’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특급 유망주’ 임선동의 잠재력이 폭발한 건 현대 유니콘스 소속이던 2000년이었다. 2000시즌 임선동은 29경기에 선발 등판해 18승 4패 평균자책 3.36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 해 정규시즌 다승 1위(18승), 탈삼진 1위(174탈삼진) 타이틀은 임선동 몫이었다. 임선동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야구 대표팀의 동메달 획득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임선동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임선동은 2007년 은퇴를 선언한다. 현재 임선동은 연세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재직 중이다.
1995년 고려대를 졸업한 조성민은 NPB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조성민은 1997년 NPB 1군 무대에 본격 데뷔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데뷔 시즌 조성민의 성적은 1승 11세이브 평균자책 2.89로 맹활약했다.
이듬해 요미우리 선발진에 합류한 조성민은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며 올스타로 선발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이 올스타전이 조성민 야구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올스타전 등판에서 조성민은 팔꿈치 부상을 당한다. 부상 이후 이전의 위압감을 되찾지 못한 조성민은 2002년 요미우리에서 퇴단했다. 일본 통산 성적은 11승 10패 11세이브 평균자책 2.84였다.
조성민은 2005년부터 KBO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조성민은 2007년까지 3년 동안 한화 이글스 불펜투수로 활동한 뒤 은퇴했다. KBO리그 통산 성적은 3승 4패 4홀드 평균자책 5.09였다. 그리고 2013년 1월 6일 조성민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대중을 안타깝게 했다.
박찬호는 임선동, 조성민보다 빠르게 프로에 입성했다. 박찬호는 한양대에 재학 중이던 1994년 1월 11일 미국 메이저리그 인기구단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입단 첫해 LA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성장을 거듭하며 ‘코리안 특급’의 반열에 올랐다.
박찬호는 1994년부터 2010년까지 통산 124승을 거두며, 일본 국적 투수 노모 히데오가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투수 최다승 신기록(123승)’을 경신했다. 이후 NPB와 KBO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한 박찬호는 2014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 이후 박찬호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투머치 토커’란 별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2년 한국 야구를 들썩인 ‘92학번 트로이카’, 임선동-조성민-박찬호는 각자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결말은 모두 달랐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선수들의 기록은 역사로 남는다. 1992년 세 투수의 등장이 ‘화제의 중심’이었다면, 2019년 그들의 삶은 ‘한국 야구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