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NS에서 흔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광고 문구다. 1900년대 초반 서양의 문화가 동양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당대의 패션 문화를 21세기에 즐겨보란 이야기다. 남성들은 쓰리피스 정장을, 여성들은 잔뜩 컬을 넣은 헤어스타일과 망사 장식 모자, 레이스와 브로치 또는 코르셋 장식이 달린 서양 드레스를 착용하는 것이 ‘개화기 패션’의 유행 트렌드다.
롯데월드에서 진행 중인 봄 축제 ‘개화기’ 프로모션. 개화기 ‘경성 패션’을 입고 참여하면 혜택을 준다. 사진=롯데월드 제공
이 같은 ‘개화기 패션’이 유행하면서 경복궁, 인사동, 익선동 등 이른바 ‘한복 명소’로 유명한 곳에도 개화기 패션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새것을 뜻하는 뉴(New)와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의 합성어인 ‘뉴트로(Newtro,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복고)’ 트렌드가 하나의 상품으로 안착한 셈이다. 지난해 9월 처음 한국에 상륙했으니 본격적으로 유행하기까지 약 7개월이 걸린 것이다.
1920년~1930년의 경성(서울)을 무대로 한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콘셉트인 만큼 이들의 패션을 두고 ‘경성시대 패션’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애초에 ‘경성시대’라는 말은 없으니 패션을 따로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말인 셈이다.
서울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10여 년 간 한복 대여점을 운영해 온 H 씨도 최근 가게에 ‘경성 패션’으로 분류된다는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새롭게 구입했다. 한국과 일본 손님들이 찾는다는 이유였다.
이비스 앰배서더에서 서울 인사동 호텔이 ‘개화기 경성 패션’을 전문적으로 대여하는 ‘경성의복’과 함께 이벤트를 진행했다. 사진=이비스 앰배서더 제공
H 씨는 “지난해 말부터 SNS에 개화기 시절 패션이나 먹거리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한복 대여점에도 그런 류의 옷과 장식을 놓게 됐다”라며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손님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데 주로 한국이나 일본 손님들이 찾는다.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라 아예 따로 코너를 만들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이 같이 핫 트렌드로 올라선 뉴트로 유행을 두고 국내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시기적으로 일제강점기 시절(1910~1945)과 맞물릴 수밖에 없는 시대의 문화만을 ‘낭만적인 즐길 거리’로 소비할 수 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특히 높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화가 소비되는 데에는 대기업들의 부추김이 한몫을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선 H 씨는 “개인 카페도 그렇지만 프랜차이즈에서도 일본식 이름을 붙여 음식을 판매해 오고 있지 않나. 개화기 시절 복식으로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과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이벤트도 꽤 있던 걸로 안다”라며 “소비자들이 개화기 복식에 대해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 주변이 이를 자연스럽게 상품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롯데월드의 경우는 지난달 9일부터 봄꽃 축제 ‘개화기’를 진행하며 1900년대 시절을 즐길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롯데월드 내에 한복집, 가배(커피)집, 음반점, 양장점 등 개화기 상점을 비롯해 전차 및 인력거 정류소 등 1900년대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개화기 패션’을 즐기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개화기 패션을 뽐내는 연기자들과 함께 포토타임을 갖거나 고객이 직접 의상을 대여해 1900년대로 ‘타임 슬립’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는 게 이들의 이야기다.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롯데월드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일제강점기를 왜 긍정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소비하도록 부추기는가” 라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내에 마련된 1900년대 시절 거리. 사진=롯데월드 제공
이에 대해 롯데월드 측은 “이번 축제에서 쓰이는 ‘개화기’란 ‘꽃이 핀다’는 의미의 개화와 ‘개화기’라는 시대적 의미의 중의적인 표현”이라며 “특히 최근에는 뉴트로 패션이나 문화에 관심을 가진 고객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 같은 수요에 맞춰서 콘텐츠를 준비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출 증대를 위해 성찰없이 개화기 콘셉트를 차용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개화기를 낭만과 즐길 거리로 포장하다가 낭패를 본 기업도 있다. 외식업체 ‘매드포갈릭’의 경우다. 매드포갈릭은 지난달 21일 “어느 날 매드포갈릭에 1930년의 경성이 찾아왔다”라는 문구로 홍보한 ‘1930 블라썸 이벤트’를 진행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탈이 가장 심각하고 가혹했던 시대를 이벤트 콘셉트로 가볍게 여겼다는 비판이었다. 결국 매드포갈릭은 하루 만에 사과문을 올리고 프로모션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대기업들의 소비 조장과는 별개로, 시대상으로 정확한 복식 구분이 이뤄지지 않은 채 유행하는 것을 소비자들이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1930년대 모던 걸’ 의상으로 현재 대여나 판매되고 있는 의상들은 영화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입은 의상과 유사하다. 이른바 ‘화족 의상’으로 규정되는 일본의 다이쇼 시대 말 귀족들이 입던 의상으로, 국내에서는 단순히 ‘예쁜 것’에만 치중해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식업체 ‘매드포갈릭’은 개화기를 콘셉트로 한 이벤트를 열었다가 대중들의 뭇매를 맞았다. 사진=매드포갈릭 공식 인스타그램
김성일 아시아모델협회 이사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무릎 길이의 짧은 원피스나 얇은 옷감으로 어깨나 겨드랑이 등 신체 부위가 노출되는 복장이 유행했다. 장신구나 레이스가 달린 것보다 심플한 느낌을 주면서 인체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부각하는 원피스 또는 블라우스가 ‘모던걸’의 패션 특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개화기 패션’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패션업계 종사자는 “미디어에서 1930년대 모던걸들이 입는 의상이라고 주장하는 레이스 드레스와 장식이 잔뜩 달린 외투는 사실 1900년대 초 일본 귀족들이 한참 서양 귀족의 흉내를 내며 입었던 복식에 더 가깝다”라며 “오히려 실제 모던걸들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심플하고 ‘모던’한 복장을 보여줬다. 그런 부분은 너무 현대식이라서 사람들 눈길을 끌기 쉽지 않으니까 빅토리아 시대에도 안 입었을 옷을 들고 ‘개화기’ ‘경성패션’이란 이름을 붙여서 소비를 조장하고, 또 그걸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