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르네리 캐논’ 을 들고 신기의 주법으로 연주했던 파가니니는 지금까지도 바이올린 연주자를 거론할 때면 떠오르는 대명사다. 그런가하면 기괴한 외모,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연주, 문란한 생활 등으로 인해 그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란 악명으로 회자됐었다.
파가니니 초상화. 왼쪽이 앵그르, 오른쪽이 들라크루아 작품
그러나 파가니니가 과연 누구인가. 파가니니에 필적할 만한 연주자는 그 이전이나 당대,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명제에 음악 전문가들의 이견은 없다.
파가니니는 신기의 기교를 가진 연주자를 뜻하는 ‘비르투오소(virtuoso)’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음악가다. 파가니니 이전까지 음악가들은 궁정이나 교회, 귀족들에게 고용돼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이런 공식을 깨고 바이올린 하나로 연주여행을 통해 온 유럽을 열광시켰고 거만의 부를 쌓았던 최초의 전문 연주자였다.
파가니니의 주치의 회고록에 의하면, 파가니니의 손 크기는 일반인에 비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손가락이 비정상적으로 잘 늘어났고 유연했다고 한다.
파가니니 이후로 비르투오소로 칭해지는 대표적인 연주가들은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이 꼽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받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었다 깨도 바이올린 연주로 저 사람을 못 따라 간다”며 피아노에 매진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회자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파가니니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청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성을 가지고 있어 청중들이 그의 연주를 듣고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전해진다.
파가니니는 과르네리 캐논을 사용해 연주했다. 과르네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아마티, 과다니니와 함께 전통의 명품 바이올린으로 꼽힌다. 파가니니의 애용으로 과르네리는 이후 더 유명세를 탔다. 과르네리는 개성 넘치는 소리로 유명해 파가니니와 같은 연주자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 대포라는 뜻의 캐논처럼 파가니니가 쓰는 과르네리 캐논의 엄청난 크기의 소리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파가니니가 쓰던 바이올린은 현재 그의 고향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됨에 따라 보관장을 열고 정기적으로 연주되는 등 제노바 시는 이 위대한 음악가의 유품 보관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
파가니니는 스타카토, 현을 손가락 끝으로 튕겨 소리 내는 피치카토,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고 소리 내는 하모닉스 등 이전까지 없었던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바이올린 네 현 중 가장 위의 G현 만으로 연주하거나 활 대신 나뭇가지를 쓰기도 하는 등 파격 그 자체였다.
파가니니가 G현 하나로 연주했다는 사실이 이후 과장되면서 그가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파가니니의 신비의 주법은 그가 공동묘지에서 밤새 연습을 하면서 연마했다는 설도 제기됐다.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고 연주할 때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악마의 손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었다.
파가니니의 외모도 흉흉한 소문을 배가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는 키가 매우 컸지만 마치 젓가락처럼 깡말랐고 등 윗부분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와 갸름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가늘고 큰 매부리코와 도드라진 광대뼈 등 기괴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 강렬할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신들린듯 연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의 지성들은 물론 파가니니를 추종했던 리스트마저 이러한 소문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주장했고 당시 언론들도 그를 둘러싼 온갖 루머를 보도하며 악마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파가니니는 말년에 자신의 입장을 적극 해명했으나 소용없었다.
영화 파가니니(2014)에서 파가니니 역을 맡은 데이빗 가렛
냉소적인 표정과 말투 그리고 연주 외에는 은둔자의 생활을 했던 파가니니는 사교성이 제로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음악가로서의 위상으로 그를 흠모하는 숱한 여성들과 문란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정작 자신의 반려자를 찾지 못했다.
그가 유일한 인간적인 관계를 가졌던 대상은 아들 아킬레였다. 파가니니는 아킬레를 미모의 소프라노 여가수 비안키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아킬레 파가니니의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매우 미남인데 어머니의 외모를 많이 물려받은 듯하다. 파가니니는 아들 아킬레에게 있어서 정말 탄복할 만한 아버지였다. 파가니니의 바람기와 성격 차이로 비안카는 결국 그와 이별한다. 파가니니는 비안카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면서 아들 아킬레의 양육권을 획득한다.
도박장 문제에 얽혀 상당한 재산을 잃어야 했던 파가니니였지만 구두쇠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아끼고 모은 막대한 재산을 아킬레에게 상속했다.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20분, 파가니니는 향년 57세의 나이에 열네 살밖에 안 된 아들 아킬레스의 품에 안겨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파가니니는 아킬레를 귀족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해 생전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아킬레는 자신의 영지를 가진 남작이 됐다.
파가니니는 연주여행에 아킬레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숙소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극직한 사랑을 받고 자란 아킬레는 아버지의 사후 안장을 위한 묘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파가니니는 별빛 아래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수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부지지간이 아닐 수 없다.
파가니니는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 상당수를 비밀로 붙였고 악보를 남기는데도 소홀했고 제자도 거의 없어 그가 남긴 유산은 현세에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파가니니가 작곡한 대표작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 카프리스>를 들어본다면 얼마나 고도의 연주력을 요구하는 걸작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낳은 바이올린 천재 파가니니 예술의 전모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장익창 기자 sanbada@ilyo.co.kr